아빠 그리고 전쟁.
"살면서 슬퍼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슬픔은 슬픔 이외의 것으로 뒤섞지 말아야 한다. 슬픔은 제대로 다뤄졌을 때에만 시간과 함께 자연스레 사라진다. "
(백영옥, '빨강 머리 앤이 하는 말' 중)
“저 정도는 나도 하지.”
지희 아빠는 손재주가 없다. 무얼 고치지를 못했다.
”아무 걱정 할 건 없어”
그래놓고 걱정할 일이 많았을때도 반대로 말했다.
말수가 없고 조용한 아빠는 집에서 이야기할 때는 가장 허세가 많은 남자가 되었다. 엄마는 못 마땅했다.
”밖에서는 방아퉁수처럼 말 하나를 못 하다가 집에만 돌아오면 아주 말만 잘해.”
그는 문제해결을 잘 하지 못했다. 형제들 사이에서 막내로 자란 그에게 선택권이라는 건 별로 없었다. 장자도 아니고, 게다가 엄마없이 자란 아이에게 문제를 해결하라는 건 어려운 일. 그러나 그는 그렇게 그런듯 자라 어른이 되었고 약삭빠르지 못했다. 누나가 처음에 공부를 시키는 걸 형을 도와주겠다고 해도 자신도 대학에 가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악착까지 사범고등학교에 가서라도 공부를 이어오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어미를 일찍 여인 지희 아빠의 말을 결혼 전 까지는 그 누구도 차분히 그리고 깊이 들어주질 않았다.
'그저 바람처럼 이리따라 저리따라 사는 거지 뭐' 했었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가져보고 싶은 것도 없고,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바람처럼 살고 싶었다.
어릴적 지도를 보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외국에서 살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 에미없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 없는 곳. 혼나지 않는 곳, 큰 소리 나지 않는 곳. 그저 조용히 흘러가고만 싶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를 그렇게 놔두질 않았다.
컴백, 홈.
집으로 돌아왔는데 갈 곳이 없었다.
'집이 있었던 적이 있었나.. 작은 누나라도 살아있을 때는 집이 있었는데.. '
둘째 누나가 시집간 뒤로는 갈 곳이 없다.
누나들 말고는 ,, 기댈 데가 없는 그는 치열한 전쟁의 포화를 뚫고 와도 반겨줄 사람도 그 누구도 없다. 그는 월남으로 가던 배에서 사람들이 환호해주던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어머니 아버지 없이 누나들의 환송 속에서 월남으로 가는 배를 탔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서 흔드는 손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좋았다. 나라를 위해서 싸우고 싶었다.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싶었다. 자신이 싸우는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히도 모른채 그는 월남으로 향했다.
통신병으로 그는 위험한 순간이 많이 없긴 했지만, 그는 다른 전우들과 살을 부대끼며 하나인 것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운이 좋은 것인지, 늘 그는 그 소대장 밑에 있었다. 소대장은 말없는 그를 좋아했고 도윤을 기꺼이 자기 수하에 두었다.
사실 그는 베트공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는지도. 죽어가는 동료 앞에서 같이 울어주는 동료애가 있어서 그나마 삶의 의미를 가졌다. 제 어미가 죽은 마당에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세 살 아이가 누나랑 놀겠다고 왜 같이 안 놀아주냐고 형이랑 누나에게 조르다가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린 그.
부끄러움이 삶을 지배해버린 그에게 월남전 전장에서는 부끄러울 것도 창피할 것도 없다. 지긋지긋한 총성 소리와 폭탄 소리가 무섭지만 이 곳에서는 그가 삶에 대해 탐해도, 욕심부려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기대해줄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옆의 동료가 나의 소대장이 오늘 나의 안위를 걱정해주니까 월남에서의 삶은 가벼운 깃털만큼은 아니었다.
어릴적 피난갔던 부산에서도 그는 천덕꾸러기는 아니었다. 그와 같이 어미잃은 아이들이 거기에는 천지였기에 그 누구도 그를 뭐라 한 사람이 없다. 친구들 모두 자신처럼 어미잃은 오리처럼 그렇게 갈 길 잃은 오리로 살아갔다. 어린 아이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놀이뿐이었지만 놀기만 해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은 장한 녀석이었다. 잃어버릴 것도 욕 먹을 것도 없는 곳.
컴백, 홈.
매일 일하러 회사에 나가는 지희 아빠는 집으로 돌아온다. 버스를 타고 흔들리는 버스에서 차창을 바라보며 돌아갈 가정이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버스에 내려 그는 어김없이 슈퍼마켓으로 간다.
호주머니 돈을 털어 슈퍼에 가서 아이들 먹을 것을 잔뜩 사가지고 검은 봉지를 흔들며 아이들에게 돌아온다. 아내는 타박을 하지만 그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서 아이들에게 안기는 아빠 노릇이 좋다.
아이들이 좋아하면 그도 어릴 때의 자기를 위로하는 것 같아 좋다.아이들이 좋았으면 그 뿐.
아이들이 맛있게 먹으면 그도 맛있게 먹는 기분.
그래서 오늘도 그는 검은 봉지에 한가득 과자를 담아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