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밤과 음악
“당신이 세상의 그 어떤 소리도 닿을 수 없는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에 갇혀 있다 한들, 당신에겐 여전히 보물상자와도 같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지 않겠는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학교 2학년이 되니 이제는 조금 더 큰 것 같다. 중학생이기에 더더욱 고민도 많고 힘든 마음도 있는 지희. 지희만큼 친구들도 다양한 고민들이 있었다. 친구관계, 성적, 집안문제, 외모 등등.
아이들 각자의 고민들은 다양해서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도 친구들과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으로도 모자랐다.
삼삼오오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먹기도 하고
신포동으로 옷을 사러가기도 하고
또 누구는 그러지 못하고
가슴에 짐을 얹고 학원으로 향하기도 했다.
어떤 아이들은 몸에 안 좋을 텐데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또다른 어떤 아이들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늘 어디론가 향했다.
누구는 술을 먹으러 간다고도 말하고 어떤 아이들은 오빠들을 만나러 간다고도 말했다.
텔레비전에서 임신하는 중학생들과 범죄와 연루된 어린 학생들이 나올 때마다 지희는 같은 반 친구들의 방과후 시간을 염려했다.
그 아이들이 향해서 가는 곳은 어디일까.
어쩌다 옆 반 친구가 결석을 계속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서로들 하면 지희는 그 뉴스들이 떠오른다. 자기만큼 어린 친구들이 벌써 겪을 큰 일들이 두려웠다. 옆 학교와 건너 학교에는 한 반에 1명씩은 안 나오는 반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하교길, 집으로 가는 가볍지만은 않은 소녀들의 대화.
윤주가 말했다.
“ 옆학교 내 친구네 반은 결석하는 애가 있는데 걔는 가출했대.“
“ 진짜?” 지희의 놀라는 말에 소진이는 그게 놀랄 일이냐는 듯 특유의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야, 그 학교 원래 날나리들이 많잖아.”
“ 그건 그래도. 가출하면 걔네는 어디에서 자?”
지희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앞섰다.
소진이는 말을 이어갔다.
“글쎄, 친구집이나 뭐 친척집에서 자겠지. 그러다가 엄마 아빠가 잡으러 가면 다시 와. 나 아는 언니도 그랬어. 그러다 또 가출하기도 하더라.“
지희는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 가출이라는 단어.
얼마나 힘들기에 집을 나가는가 생각이 되긴 해도 집 밖의 밤, 학교 밖의 낮 시간. 떠도는 아이들의 낮과 밤은 지희가 상상하기에는 어려운 일.
“야, 언니네 떡볶이로 가자.”
걱정스러운 지희의 얼굴을 보고 선희가 어깨동무를 하며 지희를 잡아 끌고 윤주와 소진이의 가방을 치며 제친다.
“야, 같이 가.”
그 뒤를 윤주와 소진이도 따라간다.
“늦게 오는 사람이 떡볶이 사기!”
중학생임을 잊은 듯 아이처럼 엄청 큰 목소리로 뒤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웃는 선희, 따라 웃는 지희. 신주머니를 흔들며 지희와 선희를 뒤쫓는 소진이와 윤주.
아이들은 재잘재잘 끊이지도 않을 대화를 하며 오늘도 선희를 따라 떢볶이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지희는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기 위해서 녹음기 버튼을 눌러가면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작곡가의 이름과 연주자의 이름, 러닝 타임을 재고 있는 이 숙제는 지희에게 클래식 세계에 한 걸음씩 또 한걸음씩 걸어가게 해준다.
선생님이 왜 이 숙제를 우리에게 내주었는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자신의 학생들이 각자의 문제와 무거운 마음들을 잘못된 방법들로 푸는 것을 염려한 것.
클래식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지희의 마음의 짐도 내려놓아진다.
<당신의 밤과 음악>은 밤 10시에 하는 KBS클래식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지희는 이 프로그램이 좋아졌다. 관악기의 멜로디 소리로 시작되는 이 시간은 음악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할 수 있다. 클래식 듣기 숙제는 음악의 세계로 안내해준 선생님의 깊은 생각이 담겨있는 소중한 일.
지희의 여드름
변해가는 몸
자신감이 없어지는 외모
성적에 대한 고민
친구들과의 미묘한 갈등과 감정들
엄마와의 언쟁과 나아지지 않은 집안 사정
엄마와 아빠의 걱정들 속에 지희의 걱정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시간들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익히 들었던 음악시간이나 피아노학원에서 익히 들어왔던 작곡가의 이름들 뿐 아니라 가브리엘 포레, 브람스, 클라라와 슈만 , 바르톡, 말러, 홀스트 등 지희가 클래식 FM을 듣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그 수많은 이름들을 알 수 있었다.
밤 10시, KBS클래식 FM<당신의 밤과 음악>을 켜 놓은 시장 속의 지희의 집, 그리고 지희와 윤희의 방은 차분하고 평온한 안식처.
엄마의 두꺼운 이불들
내일 입고 가지런히 정리된 교복들
필통 속의 여러가지 색색깔의 펜들이
음악의 배경이 되고
불을 끄고
듣는 음악 소리들은 지희의 마음을 평온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