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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감독
Aug 21. 2021
환자의 서 pt.2
괜한 고집 그리고 세 번의 눈물
개방형 복합골절 수술...
네 수술명 혹은 병명이다...
개방형이라는 건 뼈가 부러지면서 살을 뚫고 밖으로 돌출되었다는 거고 복합은 단순하지 않게 산산이 부서진 뼈 모양을 보면 어떤 의미인지 쉽게 유추가 가능하다.
이미 두 달도 더 전이지만 뼈가 부러지면서 밖으로 튀어나오는 걸 나는 내 두 눈으로 목격하고 말았다.
축구하다가 발이 꺾이는 일 만으로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액션 영화에서 자주 봐오던 장면이 특수효과 없이 레알로 구현되는 점이 참으로 신기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건 이 현상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충격적이라서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않았던 점이다.
그냥 부러지는 순간 헉 소리와 함께 쓰러져서 발을 부둥켜안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의외로 차분하게....
철판과 함께 피스 7개를 밖은 수술이 끝난 후 담당의는 수술이 잘됐으니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리고 2주 정도의 입원을 마치고 통원치료로 변경하기 위해 통깁스를 할 때 즈음 의사는 네 수술부위의 엑스레이 사진을 주며 기념으로 받으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선 신기한 경험이기는 하기에 주는 데로 받기는 했지만 무엇을 기념하라는 건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게다가 정강이 뼈 두 개 중 철판을 박지 못 한 뼈가 산산이 부서진 사진을 가리키며 폭파라도 된 듯 신기하게 터진 뼈가 보이죠. 이것도 붙을 거니 걱정 마세요.
라는 말을 남겨주었다. 폭파라도 된 듯 펑하고 터져버린 내 뼈가 과연 어떤 로직과 프로세스를 통해서 다시 붙을 진 의문이었지만 의사에게 이런저런 걸 물어볼 멘털도 아니었더 나는 주섬 주섬 짐을 챙기고 병원을 나섰다.
축구를 같이 했던 친구의 차로 집에 돌아온 후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나 혼자 집에 남겨졌다.
수술 부위 때문에도 내 멘털 때문에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고 및 수울에 대해서는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내 일 말고도 작년에 있었던 큰 슬픈 일로 인해 어머니를 비롯 다들 바쁘고 어느 정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가족들에게 이러 비보로 신경 쓰이거나 걱정스럽게 하고 싶기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SNS에 올린 사진과 글 때문에 매형에게 연락이 왔고 매형에게만 사실을 알리고 가족들에겐 비밀로 해달라곤 했다...
특히 어머니에겐.......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와 있지만 조카들을 돌볼 특별한 상황이어서 올라오셨다. 막내아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좋은 일만 들려드리기도 부족한 때에 안 좋은 일로 스트레스를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태어나 처음 겪는 골절 수술이기에 회복까지 몇 달이 걸릴지 어떻게 치료가 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던 나는 한두 달이 지나면 보란 듯이 말짱해져서 언제 그랬냐는 듯 가족 앞에 다시 나타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달이 넘게 지난 지금 의사를 만나고 내상황을 이해한 시점에서는 저 생각이 얼마나 철이 없고 한심한 생각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아마도 앞으로도 최소 두세 달은 지금처럼 혼자서 생활과 재활을 이어가야만 한 다는 걸 깨닫게 되자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일주일 전쯤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내가 자주 연락을 안 드려서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내 부상에 대한 소식은 매형을 통해서 누나와 작은 형만이 알고 있는 상태이고 앞서 내가 부탁했듯이 어머니는 내 부상을 모르고 계신다.
어머니는 평소처럼 전화로 날 혼내시고 구박하고 돈 안 되는 그 일도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못하겠다며 은근히 걱정도 해주셨다.
매우 일상적인 대화였다. 한데 이번에 추가된 질문이 하나 있었다. 추석 때 고향에 내려올 거냐는?
평소에도 고향에 내려가는 가 눈칫밥 먹는 걸 즐겨하는 성격이 아니고 또 연습이나 공연이 자주 겹쳐서 귀향을 못했던 적이 있던 나이기에 이번에도 가볍게 못 내려갈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왜냐고 이유를 묻는 어머니에게 선뜻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친 다리로 갑자기 어머니를 봬서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사실 이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도 너무 죄송스러운 일이기에....
그러자 어머니는 공연 준비 때문에 오지 못하는 것이냐고 다시 물었고 나는 우선 그렇다고 답을 해버렸다.
하지만 사실 공연도 연습도 예정되지 않았다. 예정은커녕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태였음을 알았기에 거짓말로 답을 해버린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못 본 지 오래됐고 일 년에 몇 번 보지도 못하는데 웬만하면 와서 쉬다 가라고 말씀과 내심 보고 싶음을 은근히 전해왔지만 나는 아니라고 이번엔 아무래도 바쁠 것 같다며 애써 둘러대고 있었다.
그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실 아무의 도움 없이 혼자서 지금 생활을 유지하는 게 쉬운 상황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신이기에...
지금 상황으론 일은커녕 나 자신 하나 챙기며 일상을 사는 것 자체가 하루하루 힘든 시간들의 반복이기에...
하지만 남들한테 폐 끼치고 의지하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이 괜한 고집과 남 걱정하는 오지랖의 결과물이 좁아 터진 눈구멍에서 액체로 변해 흘러내린 것이다.
그 후 어머니와의 통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어질 수 없었다. 건강히 잘 계셔요.라는 내 마지막 말로 갈무리 지어졌다.
요즘 유난히 자주 하는 건강하세요.라는 말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응원이자 격려의 말 일 것이다.
이틀 전 수술을 받은 병원에 가서 담당의의 진료를 받았다. 1달 만에 다시 보는 순간이었고 수술 후 10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은근 기대를 하고 다시 찍은 엑스레이 사진의 내 뼈들은 고대로였다.
나이도 있겠거니와 사실 산산이 부서진 뼈들이 그리 쉽게 붙을 거라고는 예상을 하지 않았지만 그걸 예상한 것과 다시 확인하는 순간의 심리적 갭은 꽤나 컸다.
아마도 3달 정도는 더 지금과 같은 삶을 버텨내야 하는구나....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공연이든 촬영이든 지금까지 들어오고 있는 작업들을 거절하고 사양하는 순간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앞으로 한 두 달만 지나면 다시 작업할 수 있을 거야~라는...
하지만 두 달이 넘어서도 고대로인 내 뼈들을 본 순간 얼마나 치기 어린 철없는 생각이었는지를 실감하게 되었고
아마도 올해 안에는 정상적인 작업은 나와 만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팻말이 붙어있는 대기의자에 앉아 혼자 펑펑 울었다.
물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지 않을 정도의 선을 지키면서....
눈물도 침이나 다를 바 없이 체내에서 나온 분비물일 테니 코로나 시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순 없지 않나...
한 시간 정도 감정을 정리하고 눈가에 붓기도 가라앉히고 나는 병원 내에 있는 스포츠재활센터에 갔다.
수술 후 10주가 지난 지금부터 공식적인 재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40여분 간 스트레칭과 근육 훈련을 받은 후 마지막으로 두 다리로 걷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물론 쉽게 될 리 없었다. 목발과 보조기 없이 걸어본 적이 없고 보조기를 해도 사실 제자리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부상당한 왼쪽 다리를 계속 안 사용해서 근육이 모두 사라지고 너무 얇아진 상태에다가 발목관절도 굳어 있어서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치료사 님의 도움으로 우선 두발로 서있기 다친 다리에 무게 싣고 지지하기 제자리 걷기 등의 단계를 거친 나는
다시 두발로 걷는 연습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번에 실패 끝에 왕복 10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매우 느리고 불안한 걸음이긴 하지만 내 두 다리 만으로 걷는데 성공을 하게 되었다.
. '철판 튼튼하게 박혀있으니 절대 다시 안 부러집니다. 걱정 마세요.'
라는 치료사님의 한 마디가 큰 힘이 되어준 것 같다.
두 달여 만에 내 신체와 근육의 힘만으로 걸어 다닌 짧은 순간 드디어 세 번째 눈물이 흘러내렸다. 앞서 두 번째와는 다른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가능성에 관한 눈물이...
그 순간 치료사님이 너무 고맙고 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본 치료사님은 매우 기뻐하며
의사 선생님도 이 모습 보면 기뻐할 거라며 응원을 해주셨다.
이제 재활치료는 나 자신의 몫이 되었다. 일주일간 셀프 재활 후 다시 치료사님을 만나 검진을 받을 예정이다.
집에 온 후로 사실 아직 제대로 걷질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재활치료에서의 그 짧은 눈물의 순간을 되새기며 보다 긍정적인 꿈을 가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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