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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18. 2021

중년

중년



 싯누런 양푼에 한가득 담아 주는 국숫집이 있는 것이다. 멸치 다싯물에 양념장 끼얹어 주고 김치는 알아서 덜어 먹는 국숫집이 있는 것이다. 스쳐 지나다 사람들 북적거린다는 이유보다는 값이 싸다는 이유로 한 그릇 시켜 먹는 국숫집이 있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국숫집에서 아주 먼 데 살면서도 비 오는 날 괜히 실없이 들러서 한입 그득 국숫발을 끌어당기고 싶은 것이다. 그도 그런 것이 피자나 햄버거 챙겨 먹을 멀쩡하게 생겨 먹은 젊은 연인이 주머니 사정을 핑계로 한번 들렀다가 거기서 그만 아직 오지도 않았고 올 수도 없는 어떤 삶의 비의 같은 것을 미리 체득하게 되는 국숫집이 있는 것이다. 식당 귀퉁이 식탁에서 양푼의 국숫발 건져 올리고 국물 들이켜는 사이 의식 없이 ‘양푼’ 그릇에 친밀감 같은 걸 느끼게 되는 국숫집이 있는 것이다. 몇 날 째 그대로인 퐁퐁 물 가득한 고무함지 속에서 억센 수세미가 들락거리길 몇 해째. 양푼의 구릿빛 도금은 벗겨지고 어지간히 칠해도 화장발 받지 않는 얼굴처럼, 흠집이 많아도 너무 많아 되레 흠집에서 광택이 나버리는 양푼 이란 그릇은 또 얼마나 헐하고 배고픈 그릇이냐.



 더운물에 씻어내고 마지막으로 세찬 수돗물에 헹궈 엎어 놓았는데도 정갈함에 앞서, 아니 정갈함 때문에 더 춥고 배고프게 하는 양은그릇. 겨울엔 누구라도 더운 손으로 만져 주면 ‘쩍’하고 달라붙어 소스라치게 하던 양푼은 왜 아직도 생의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지. 왜 아직도 방귀 한 번에 배가 쑥 꺼져버리는 가루음식에나 어울리게 됐는지. 발길질에 으스러지고 담장 밖으로 걷어차이듯 왜 우리들 생 너머로 날아가지 않았는지. ‘양푼’이란 말에는 ‘양아치’라는 말이 곁다리로 따라붙기도 하지만 건진 국숫집 양푼에게는 농사일에 부려 먹으려고 벽지에서 데려온 ‘봉래’나 ‘언자’라는 이름들과 더 잘 어울리게 되고, 입으면 등판에 성에가 서리 듯 한기를 느끼게 되는 낡은 스웨터 같은 것에 더 잘 어울리게 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건진 국숫집은 오래된 공원 근처에 있다. 공원에는 진종일 나무와 나무 사이 명경 같은 하늘. 그러나 반추할 것도 반납할 생도 보이지 않는 하늘만 파랗고, 진종일 나무와 나무 사이 명경의 하늘 떼다 업고 달아나고 싶기도 해서 파란 하늘이 더 무거운 중년들에겐 공원의 나무들 숨소리도 괜스레 무겁고, 내놓은 이파리마다 참 사연도 많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한 것이다. 어디서 주정꾼 소리가 들려 고개 돌려보면, 공원을 돌아 즐비한 돼지국밥집이다 순댓국집이다 석쇠불고기 집이다 해서 식당마다 커다란 솥을 걸어놓았고, 먼 데서 보면 순도 백 퍼센트 명주실 같은 흰 김을 풀풀 피워 올리는데 드나드는 손님들이란 방금 명경의 하늘을 올려다봤던 당신이 아니던가.



 공원 근처에는 또 삼천 원에 입장할 수 있는 ‘성인텍’이 있는 것이다. 입소문 듣고 변두리에서 지하철 타고 춤이나 한 판, 호시절이 생각나는 이들이 꾸역꾸역 모여드는 것이다. 한 때는 백화점이다, 시계점이다, 수영복 전문점이다 해서 뻔질나게 손님들 드나들던 건물에서는 이제 지루박 차차차 리듬이 오래된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니 이 한물간 리듬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지루박이다 차차차다 하는 리듬은 국숫집 근처 골목이나 배회하는 것이 전부이고, 더는 번화가 쪽으로 가봐야 유행에 뒤처져버린 것이니, 이쯤에서 누구에게라도 한 번 몸을 빌려줄 수 있다는 식으로 지루박 차차차 리듬은 배회하는 것이다.  국밥집 간장 냄새 같은 것이 밴 리듬은 한때 춤 꽤나 했던 양반이라고 소문이 났거나, 생긴 것이 순전히 화장발인데 눈 삔 사내새끼들 시선을 한 번에 모은다는 이유로 소문이 나쁘게 나버린, 여자의 몸에 감겨들면 그래도 교태가 흐르고 몸에 착 달라붙어 아직은 벗어 함부로 내버릴 수 없는 오래된 스카프 같기도 한 리듬인 것이다. 하지만 자칫 누구에게라도 한 번 빌려줄 수 있는 몸이라는 말이 또 어떤 이에겐 자칫 한 번 벌려 줄 수도 있는 몸으로 오독하게 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굳이 배가 고프지 않은 데도 서점 가던 길에서 에둘러서라도 찾아가는 국숫집엔 여전히 황혼이면 삼삼오오 중년들 가득하다. 식탁마다 화장이 덧칠된 여자 한둘씩 끼어 있고, 그녀들 주변은 불어버리고 주름 많은 허리춤을 황홀하게 감싸 주고 돌고 돈 중년의 사내들 앉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늙은이들 틈에도 끼지 못하고 진짜 황혼이 돼버린 백발의 할아버지들 서넛이 또 한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노인들은 유치원생 아이처럼 순해져서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얘기도 느리고 어눌했으니, 백발의 노인들 이야기는 쉽게 알아듣고 해독할 수 없는 음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진종일 공원 햇살 온몸에 받아내는 나무보다 더 나무같이 앉아 있다가 해 질 녘 들른 국숫집에 노인 들이 국숫발을 천천히 건져 올릴 때에는 새파란 젊은이도 중년의 몸을 거치지 않고 직방으로 백발의 노인들 몸으로 뛰어들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천천히 국수를 먹을 때 그들의 몸에는 어떤 신성이 배어 나오고, 그들 신선의 몸들도 옆 식탁의 춤판에서나 헐떡거리던 중년의 몸을 부러워하니. 그러나 마흔 중반에서 곧장 백발의 몸으로 건너온 듯 한 이유는 단지 국숫집 의자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필요충분 요건을 갖춘 것이 아닐까.


 사람들 들어차 빈자리 남아 있는 식탁이라곤 하나. 동석한 그이의 본새로 봐선 그도 한때는 한량의 시절을 아직도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니, 국숫발 건져 올리는 어깻죽지엔 여전히 방금 끝마친 춤사위의 여운이 남아 있고, 아침에 문지른 구두의 물광은 은은히 그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이것으로도 충분히 그는 자기의 기호를 발산하며 살고 있다고 보일 수 있겠지만, 그의 국수 그릇 근처에 어른거리는 비끄러맨 넥타이는 한량의 시절 유행을 탔다가 밀려나서 다시 복고풍을 타고 있지만 한량 시절 자이브로 지루박으로 얻은 주름 많은 얼굴을 만회하기엔 너무 오래 살아버린 것이니, 이젠 카드깡 하듯 팔아버릴 모양도 때깔도 없어져 버린 중고(中古)의 생에 두 번 다시 복고풍(復古風)은 오지 않을 것이니.


 中古란 또 무엇이냐? 
 

 그것은 저기 있는 저거 , 턱하니 있는 저거, 고물상에 팔아 치우기엔 아직 속이 멀쩡해 보이는 저거, 무작정 내버려 두자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저거, 몇 군데 손보면 아직 한 삼 년 굴려 먹을 듯한 저거, 재수 없이 도로 한가운데 퍼져 괜한 곤욕 치르게 할 저거, 누가 거저 가져가겠다고 하면 얼마쯤은 꼬드겨 받아야 할 값어치가 있다가도 거저 가져가라 하면 겉보기 다를 수 있다며 고개 저어버리는 저거, 턱하니 있는 저거, 폐차에서 뜯어낸 저거, 기름걸레로 문지르면 기름때 밑에서 광(光)이 올라오는 저거, 작업화 밑창으로 몇 번이나 걷어 차여도 턱하니 있는 저거, 소나기 쏟아져 피우던 담배 빗속에 던지고 들어가면 다방 커피 배달 온 아가씨는 오토바이 다니는데 신경 쓰여 죽겠다고 좀 처치해달라며 손가락질 당하는 저거, 옆에서 누가 “그래도 한번 놔둬 봐라” 하는 ‘저거’로 취급 받는 중고라면


 악기점 입구 화강암 벽에 기대 놓은 콘트라베이스. 그것은 중고도 아니고 폐품도 아닌 채 장난꾸러기 손이 아랫배나 한대 퉁 쳐주고 가버리고, 얻어맞은 울림이 그를 존재케 하는 근원이라 치면, 커다란 등치가 참 무료하고 하릴없이 볕만 쬐고 있는데 한때라고 해 봐야 고작 멋쩍게 뒤편에 밀려난 듯이 있다가, 어쩌다 한번 찾아오는 기회를 기다리며 숙고하면서 귀 기울이면서 악보 상에 짧은 한 줄 차례가 오면 울렁울렁하는 게 고작인, 급수로 따지면 B(삐)급 정도 되는 콘트라베이스 같은 것인데. 근처 상동교 밑에는 낮술에 불콰해진 사내들 고스톱 판이나 빙 둘러서 목 빼고 있으니 한자리에 오래 볕을 쬐게 된다는 것은, 볕을 오래 쬐고도 뜨겁지 않다는 것은, 다 됐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세상 배경 될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고픈 배에 국숫발 빨아들이는 소리는  천국 같기도 하고, 어떤 진수성찬보다 커다란 포만감을 주기도 하지만, 여기서 어떤 이는 또 춤 기운에 술기운에 취기와 객기가 더해 만취의 밤을 맞아버렸으니, 아, 이제라도 어디 가서 누구에게라도 몸 한번 빌려줄 수 있을까 했으나, 만취의 밤 가로등 불빛 못 미치는 공원의 나무에 오줌발이나 뿌려 대는 게 고작 이거나, 나무를 껴안다 나뒹굴고 입에 한가득 벚꽃 같은 게거품 피워 무는 게 고작인 것이니, 오른손이 다급히 입구녕을 찾아 들어가고  속에 것 쏟아내고, 씹어 삼킨 것 모조리 쏟아내고 싶어서 마중물 붓듯 더 깊이 입구녕 속으로 오른손을 집어넣게 되는 중년이여! 어찌하여 더듬기만 하고 가늠하기만 해야 하는 안간힘을 아직도 거두지 못하는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신음과 욕지기 섞인 비음이라도 쏟아내고 싶은 데, 토악질하고 부르르 경기를 일으킨 후, 어떤 깨달음 후의 응시 같은 눈을 한번 이라도 뜨긴 했던가! 엎어진 몸에서 날갯죽지 하나 삐죽이 돋아나 그의 몸에 날갯죽지 하나 삐죽이 돋아나 그의 몸에서 날아나려다 말고 퉁퉁 그의 등을 두드리는 왼손아. 



 덧칠한 화장이 못내 아쉬워 분칠을 더 해보지만 돌아보면 몸에서 벚꽃 잎 피고 날리던 날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고, 이제는 국숫집 식탁 밑에서 종아리에 살비듬이나 긁어대는 왼손이여. 늦은 밤 국숫집 설거지통 물은 버려지고, 버려진 설거지물이 넘쳐 인도에 고여 얼어 버린 자리. 버려진 물은 검게 얼어붙어서 마치 수족관 밑바닥의 활어처럼 언제 미동 한번 할는지 알 수 없게 되고, 살얼음 밟아보면 칠성시장 난전의 어머니들 몇 겹씩 껴입은 정전기 이는 스웨터 같고, 입 벌린 잠에서 언뜻 신 김치 냄새가 나곤 하던 잠든 어머니 몸부림에서 나던 뼈마디소리 같기도 하여, 마음이란 게 왈칵 쏟아져서 녹여준다 한들 설거지 물맛밖에 볼 수 없을 생을, 마음이란 게 껴안을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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