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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벗다

by 일뤼미나시옹


빛을 벗다

- 김정용


쉬면서 음악도 쉬고 먹기도 쉬고

잔 돌멩이 든 호주머니도 쉬고

방바닥을 훔치던 물걸레도 쉬고


신발에서 양말에서 쉰내에서 빠져나온

발의 유일한 기쁨은 맨 발 일 때

냉수에 들어가 열 손가락이 만족할 때까지

비누칠 없이

냉수욕하고 나왔을 때

발이 빛을 벗을 때


발의 빛은 나였기에

얼마나 개운한가


쉬면서 예프게니 오네긴도 쉬고

필사적인 가뭄도 쉰다


냉수를 겪어본 적 있을까 싶게

마트에서 산 뽀얗게 흰 꽃,

이름도 안 보고 집은 자잘하고 하얀 꽃

얼떨결에 함께 쉬게 되었다


이름을 묻지 않고 쉬는 거

동참하고 빛을 벗자


햇살에 들어가서

모두 자기 빛을, 쉬기 전의 빛을

벗자


오후여, 너도 빛이 있다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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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뤼미나시옹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예술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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