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처럼 닳아가면서

by 일뤼미나시옹


비누처럼 닳아가면서

-김정용



우리는 비누처럼 닳아가면서 검은 내리막 길에 살았지 미끄러지는 너는 달 쪽으로 기울었지 나는 손에 거품을 일으켜 너의 가로등을 만들었지


우리는 비누처럼 닳아가면서 이야기했지 너는 막다른 골목에 서서 라일락 향이 될 것이고 나는 부르튼 손에 비누칠을 하는 저녁 해에게 꺼져 들어갈 것이라고.


우리는 비누처럼 닳아가면서 기억했지 너는 난장에 돈 벌러 가서 돌아오는 중이었고 나는 개울가에 앉아서 빈 새가 되었지.


우리는 비누처럼 닳아가면서 협소한 방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방금 건너온 개천에 배고픈 돌에 대해 이야기하였지 너의 등은 닳아 있었고 나는 더운 손으로 너를 잠들게 하였지.


우리는 비누처럼 닳아가면서, 거울을 닦았지 그 먼 곳에 너와 그 먼 곳에 내가 천천히 닳고 있다는 것을 매일 저녁 알게 돠고 큰 산이 비누거품 같은 눈을 껴안고 클클클 우는 밤이란 것도 알게 되지.


우리는 비누처럼 닳아가면서 가난해지지 참 좋은 가난 이란 말 닳아가는 것에 덧없는 것에 어깨를 덮어주는 남방셔츠 같아서 빈 서랍 안에 따뜻한 공기 같아서


우리는 비누처럼 닳아가면서 우산을 나누었지 빗소리에 조금씩 지위지는 얼굴을 바라보았지 우산을 걷어내면 나는 너로부터 멀리 미끄러졌지


우리는 비누처럼 닳아가면서 첫겨울이네, 파란 냉기의 첫서리가 어리고 나뭇가지 타는 저녁을 빌어서 밥을 떠 먹여주었지 그때 해는 아직도 우리의 잔등에 미지근하고 나는 너의 눈에 한 방울의 거품을 손 끝으로 맞아주네.


우리는 비누처럼 닳아가면서 거울을 보네 거품의 언어는 우리의 겉치레를 터트렸고 우리는 작고 협소한 내일로 미끄러지며 나는 그 먼 곳에서 닳고 있는 너를 더운 손으로 잃어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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