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Bㅔ스트 Gㅔ임, 잇츠 Mㅣ

[동네 여행자] 25 사진...unsplash

by 정원에


아내가 아내가 된 지 22년. 그동안 내 기억 속에 단 한 번도 앓아누운 적이 없다. 내가 두, 세해에 한 번씩 심한 몸살로 헤매는 동안에도. 집에서는 사계절 거의 민소매 차림이다. 나이가 조금 더 들면서 갱년기인가 하면서 더욱 그런다.


그런데 계속 옆에서 지켜본 내가 더 잘 안다. 아니다. 원래 그랬다. 아등바등 운동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생활 면역력은 나보다 몇 배 더 강하고, 깊다. 몸도 마음도. 그런 아내가 지난주 금요일 저녁부터 많이 아팠다. 그러다 이번 주 월요일. 난생처음으로 출근까지 못했다.

수능이 코앞이라 그런 아내를 보면서 출근할 수밖에 없던 마음이 참 무거웠다. 그 마음 때문이었을까 월요일 오전 10시가 조금 넘었는데, 아내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많이 놀랐다. 막 재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나를 지켜본 듯 화면에 아내가 떴다. 그렇게 독감과 코로나가 동시에 아내를 붙잡았다.

지금은 자가 격리가 권고이다. 하지만 두 가지가 겹치는 흔하지 않은 경우라 의사의 강력한 권고로 5일간 집에서 쉬어야 했다. 월, 화, 수. 그렇게 이틀을 고열과 기침, 가래, 몸살이 뒤섞여 맥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당연히 퇴근하고 버릇처럼 하던 동네 산책도, 타닥이 산책도 건너 뛸 수밖에. 어떤 사정이었건 건너 뛴건 평생 다시 오지 않지만.


아내는 스포츠, 운동, 뭐 이런 거하고는 거리감이 꽤 있다. 땀 흘리지 않고 쉬면서 힐링하는 걸 더 좋아 한다. 그 면에서 나와는 지구 반대쪽 우루과이 앞바다쯤이나 될 거리감이 있다. 라이프 스타일이 대척점이다. 그러다 따님이 열 살이 될 무렵부터 야구장에 남매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처럼 난생처음 야구장, 아니 야구 구경을 처음 해보는 부모님까지 모시고. 그렇게 남매처럼 아내는 나 때문에(?) 엘지 트윈스 팬이 되었다. 그리고 먼저 직관(야구장에 직접 가서 관람)하자는 말을 나보다 더 자주 하기 시작했다. 야구장에서는 선수 한 명 한 명의 등장 음악(BGM)을 다 따라 불렀다.

3시간 가까이 계속 서서 있는 체력에 한번 놀랐지만, 특히 안무를 따라 하면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더 놀랐다. 게다가 경기가 끝난 후 자정 무렵까지도 선수들이 퇴근하는 길목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은 처음에 낯설기까지 했다. 그렇게 사십 대의 아내는 나의 이십 대가 되어 나와 야구장에서 다시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29년, 아니 결혼 후 22년간 아내 인생에서 없었을 폭발적인 열정이 그렇게 생겨나는데도 우리 팀의 결과는 항상 아쉬웠다. 항상 경우의 수를 따져야만 하는 팀이 되었다. 내 추억의 갤러리중 한 장면. 어느 해에는 다른 동네로 가족 여행 중이었다. 그날도 역시 이기면 올라하고 지면 떨어지는 뭐 그런 날이었다.

그런데 우리 팀이 아닌 경쟁팀이 지면서 가을 야구를 할 수 있게 된, 그런 날이었다. 그때 우리 넷은 숙소에 들어가기 전 주택가 조용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한때는 야구를 할까까지 했던 아드님도, 껑충껑충 뛰어다니던 따님도 서로 마주 보면서 주먹만 불끈 쥐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악!

2023년 11월 10일.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수원 원정 경기. KT와 1승 1패를 나눠가진 나의 팀, 엘지트윈스.


처음에 같이 보다가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내의 환호성이 나를 깨웠다. 늘 자던 시간을 한참 넘겨서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던 때다. 그때가 참 좋긴 좋다. 노곤하게 졸리고, 늘어지고. 그런데 아내의 환호성은 그렁그렁하게 살짝 탁했다.


0:0 → 3:0(외국인 4번 타자 오스틴의 3점 홈런) → 3:4 → 5:4(포수 박동원의 연속 이틀 역전 2점 홈런) → 5:7 → 8:7(엘지에서 야구 인생을 시작한 토박이 주장, 오지환의 다시 역전 3점 홈런)


면역력에서는 나보다 한참 앞서는 아내가, 축 쳐져 있던 아내가 한참만에 내지른 옅은 환호성. 오래전 카페에서의 외마디 비명보다는 오래, 한참을. 골~골~골이에요~처럼. 아~ 와~ 호~ 호~ 호옴런~~ 이야, 홈런. 자기야, 오지환이 쓰리런을 쳤어, 오~ 오~ 와~ 와~


일 년 동안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투수를 상대로. 도망가는 홈런, 역전한 홈런, 다시 역전한 홈런. 야구 경기에서 가장 재미있다는 스코어 8대 7. 그렇게 우리 팀은 이겼다. 어제의 8점은 공교롭게도 모두가 '한방'이었다. 그래서 환호성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지도.


홈런, ‘한 방’만큼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게 없다, 야구장에서는. 우리는 다 안다, 더 잘 안다. 야구장 밖에서는 그 한 방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니, 한 방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야구장안에 스스로를 가둬 놓고 한 방, 한 방을 염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손을 잡고 흔들고,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일주일 내내 약에 지쳐 있던 아내의 낯빛이 환하게 빛나는 걸 봤다. 힘들 때 억지로 애쓰지 않는, 아내만의 생활 면역력이 돌아오는 징조였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일주일치 밀린 업무를 혼자 출근해서 하루 종일 해결해야 한다고. 그래서 나도 같이 나가자고 했다. 오랜만에 난 근처 카페에서 책을 좀 보면 될 테니까.


홈런이건 단타(짧은 안타) 건 아니면 볼넷으로 걸어 나가건, 일단은 나가야 한다. 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잘 다녀오겠습니다'는 약속을 매일, 매달, 매년 잘 지켜야 오늘도, 이번 달도, 올해도 차곡차곡 내 인생이 되는 것처럼.


아주 달콤한 홈, 스위트 홈을 밟은 선수들이 그저 '한 방'처럼 보이지만 그 가족들은 그렇게 보일 수가 없을꺼다. 화면 밖에서는 그렇게 애써서 나갔다 들어오는 그 과정을 수없이 지켜봐 왔을테니까. 그런 면에서 나도, 아내도 일상생활에서는 꽤나 괜찮은 '선수'이지 않을까. 지금껏 잘 다녀오겠다는 약속을 잘 지켜내고 있으니까.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과정에서 나와 아내가 등장할 때마다 신나게, 멋지게, 장엄하게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가장 멋진 비지엠이, 내 생의 가장 멋진 게임이, 바로 '나'라는 걸, 세상 사람 아무도 몰라도, 몰라줘도, 우리 남매만 알고 어른이 되면 더 할 나위 없으니까.


(이 글은 https://brunch.co.kr/@jidam/1279의 기운이 모아져 기록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 마이 토포필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