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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맛은 '사이 구간'에 있다

[ 아빠의 유산 ] 46

by 정원에

아이야


요즘 어때? 재밌는 일 있니? ‘인생을 재밌게 살아야 한다’라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아빠도 너희가 항상 재밌고 행복하기를 바라.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입에 달고 사는 말,

‘재미’

아빠는 재미를 이야기할 때 주로 이렇게 말해.

‘야, 사는 게 참 맛있어.’


재미를 ‘맛’으로 표현한단다. 그런데 그게 우연이 아니더라. 재미는 ‘자미(滋味)’에서 왔어. ‘늘어날 자(滋)’, ‘맛 미(味)’. 맛이 점점 늘어나서 더 맛있어지는 거야. 감각적으로 한껏 감정이 부풀어 오르지.


재미를 맛으로 바꿔 읽어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볼래?


‘와, 수업 너무 맛났어요’

‘사는 게 점점 맛있어지는데!’

‘요즘, 새벽 공기가 아주 맛나’

‘이 책 꼭 읽어 봐, 정말 맛있게 읽혀’

‘어쩜, 넌 말을 그렇게 맛깔나게 하니?’

.....


어때? 마치 혀끝에 닿는 것 같지 않니? 부드럽게 읽히고 의미도 감각적으로 전해지고, 진짜 맛있지? 맞아. ‘재미와 맛은 삶의 감각을 깨우는 경험’이야. 아빠는 이렇게 인생의 재미도 건강, 일, 삶을 위해 먹는 음식과 같다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뭐 먹을까?’라고 말할 때 감정이 떨리는 이유는 단지 신체의 포만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깊게 음미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이런! 무시무시하지?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는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느끼고, 막상 그것을 이루고 나면 금세 무료함, 즉 ‘권태’에 빠진다는 뜻이야. 이건 우리의 미각도 비슷하단다. 배가 고플 때는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느껴지지만, 배가 채워지고 나면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감흥이 없어져.

혹시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어차피 고통 아니면 권태가 인생이라면 굳이 힘들여 살 필요 있나? 애쓸 필요 있나? 한 번이라도 재미나게 살아 볼 수나 있을까?라는 불편한 생각이 올라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히 삶이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어. 나의 인생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럼, 쇼펜하우어가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문장을 하나하나 해체해 볼게!

인생은 인간이 살아가는 총체적 시간이고,

고통은 욕망이 충족되지 못할 때의 감정이고,

권태는 충족된 욕망의 의미가 사라져 버린 공허이고,

시계추는 고정된 채 좌우로 무한반복하는 진자 운동이야.


인생이란 시간 속에서 고통과 권태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일단 인정해. 어느 정도 사실이거든. 이 말은 인생의 시공간에서 우리는 항상 풍족하지도, 만족하지도, 완벽한 행복감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요즘 아빠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봐.

“좋아. ‘인생이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라고 하자. 그렇다면! ‘고통’, ‘권태’ 사이에 있는 ‘과’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과’에는 무엇이 존재하지?

괘종시계의 시계추를 한번 상상해 봐.

시계추는 한쪽 끝에 머무르지 않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반복해서 움직여. 양쪽 끝으로. 이건 마치 인간의 삶도 언제나 서로 반대되는 두 힘이 긴장을 이루며 균형을 만드는 원리와 같단다.


밤과 낮, 기쁨과 슬픔, 시작과 끝, 행과 불행처럼 말이지. 그런데 고통과 권태는 서로의 극단은 아니야. 고통은 쾌락과, 권태는 활력과 양극단에 위치하니까. 그러면 양극단도 아닌, 고통과 권태를 왜 시계추의 이쪽과 저쪽 끝에 뒀을까?


그런데 실제 사람들의 경험을 들여다봐. 우리는 쾌락이 지속되면 금세 권태를 느껴. 재미난 게임을 하다가도 지루해하지. 그렇게 권태가 깊어지면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채 느끼는 깊은 허무와 무의미의 감정, 즉 공허함에서 고통과 권태가 서로 맞닿아 하나의 진자 운동을 이루지.


결과적으로 인생이란 시계추는,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왕복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가 눈여겨볼 건 바로 앞의 그림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의 ‘과’, 즉 ‘사이 구간’이란다.

이번에는 시계추를 좀 더 떨어져서 보자. 시계추가 절대적으로 많이 머물러 있는 시간은 양극이 아니라 그 ‘사이 구간’이란 사실을 알 수 있어. 시계추의 본질은 극단이 아니라 ‘사이’이고, 멈춤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사실을 우린 알 수 있지.


시계추가 멈춰 극단에만 박혀 있다면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새기지 못해. 끊임없이 흔들리며 양쪽을 이어 줄 때 비로소 시간이 흘러가고, 시계는 제 역할을 하지.


쇼펜하우어의 말, ‘인생이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의 의미는 그래서, ‘욕구를 추구하고 이루고 또 추구하고 이루는 것이 인생이다. 또한, 고통이니 벗어나려 이쪽으로 움직이고 권태이니 또 욕구를 채우려 저쪽으로 움직인다.’라고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니?


결국, 인생이란 게 고통과 권태라는 극값을 오가지만 그 ‘사이 구간’에서 우리는 배우고, 성장하고, 의미를 찾아내며 사는 것이지. 고통은 욕구하니까 느껴지는 감정이고, 권태는 욕구가 채워졌을 때 느끼는 공허함이니까 중요한 건 고통과 권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 구간’, 바로 그곳에 고통과 권태에서 벗어난 모든 재미가 있다는 의미로 아빠는 해석된단다.


시계추는 단지 ‘시간의 기계적 반복’, 즉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지점에 대한 은유일 뿐이지.


결국, 인간의 삶은

선형이 아니라 비선형,

나열이 아니라 왕복과 회전,

직선이 아니라 곡선,

단면이 아니라 다면,

평면이 아니라 입체니까.



그 안에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결이 다른 감정들이 오가지. 우리가 찾으려 하는 ‘재미’는 바로 그 안에 가득 들어차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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