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이야
오늘 아빠는 오랜만에 다시 읽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이 문장을 천천히 필사해 보았단다. 지난번 네가 아빠 서재에서 챙겨간 몇 권의 책 가운데 들어 있던, 옅은 초록색 표지의 얇은 그 책이지.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쓰다 보니, 이 질문이 비단 소설 속 주인공 싱클레어만의 것이 아니라, 아빠의 삶을 관통해 온,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너의 삶에도 울려 퍼질지 모를 근원적인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오늘은 싱클레어가 느낀 그 ‘어려움’에 대해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세상이 정해준 길이 아니라, 오직 너만이 걸을 수 있는 고유한 길에 대한 열망, 너의 가장 순수한 본성, 너의 영혼이 가리키는 방향일 거야.
우리는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그런 ‘자기만의 나침반’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하지만 우리는 곧 깨닫게 되지. 그 나침반을 따라 사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
아빠가 생각해 본 그 ‘어려움’의 이유 몇 가지는 이런 거란다.
첫 번째는 ‘알을 깨는 두려움’ 때문이야.
《데미안》에서 말하듯,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맞아. 우리 대부분은 ‘알’이라는 익숙한 세계 속에서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데 적응되어 있어. 부모, 학교, 사회, 친구가 만들어준 이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세계는 아늑하지.
하지만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은 종종 그 알에 균열을 내라고 요구한단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날아오르라고 속삭이지. 그건 마치 단단한 껍질을 스스로의 힘으로 쪼개야 하는 새의 고통스러운 투쟁과 같아.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겠니.
두 번째는 ‘타인의 시선’을 중력처럼 대하기 때문이야.
우리는 홀로 살아가지 않아.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를 규정하고 평가받지. “이 길은 안정적이야”, “저건 좀 이상하지 않니?”, “남들처럼만 해라”, “중간만 가도 괜찮아.”라는 세상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강력한 중력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단다.
내면의 목소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특해서, 종종 이 거대한 중력에 반하는 방향을 가리키곤 해. 그 목소리를 따르려면 타인의 인정이나 기대로부터 자유로워질 용기가 필요한데, 그건 때로 ‘틀린 나’가 되거나 외톨이가 될 각오를 의미하기도 하거든. 그 고독과 불안을 감당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
마지막으로, 그 목소리는 ‘너무 희미해서’ 듣기 어렵기 때문이야.
세상의 소리는 크고 분명하게 확성기처럼 울리지만, 내면의 소리는 아주 고요한 순간에만 겨우 들릴 듯 말 듯 속삭이곤 해. 바쁘게 살다 보면, 혹은 애써 외면하다 보면, 그런 소리가 존재했는지조차 잊어버리기 쉽단다.
아빠 역시 그 목소리를 어렴풋이 느꼈으면서도, 더 크고 쉬운 길을 택하며 외면했던 순간들이 부끄럽게도 마구마구 떠오르는구나.
사랑하는 아이야
너의 삶에도 분명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과 “그것을 가로막는 어려움”이 충돌하는 순간이 올 거야. 어쩌면 지금 겪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주렴. 그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 자체로도 너는 이미 아주 용기 있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건 네가 안락한 ‘알’ 속에 그저 머무르지 않고, 너 자신의 ‘새’가 되기 위해 진지하게 투쟁하고 있다는 증거란다.
그러니 그 어려움 앞에서 너무 쉽게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이리 힘든지 자책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헤세가 100년 전에 던진 이 질문에 수많은 이들이 그랬듯, 너 역시 너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니까.
넘어져도 괜찮고, 잠시 다른 길로 돌아가도 괜찮아.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네 내면의 희미한 속삭임에 한 번 더 귀 기울여 보려는 ‘시도’ 그 자체란다. 그 ‘시도’가 곧 릴케가 이야기했던 ‘순간의 정서를 음미’(주1)하는 최선의 방법이란다.
너만의 순간을 마음껏 음미하렴.
아빠는 언제나 너의 그 고유한 날갯짓을 믿고 응원할게.
2025년 11월 세쨋날 새벽, 너의 길을 멀리서 늘 바라보고 있는 아빠가.
_주 1> 라인 마리아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인생이란 쓰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있는 것이니까. 내 목표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네. 삶의 순간순간에서 그 순간의 정서를 음미하면서 말야.’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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