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영양실조를 막기 위하여

[ 아빠의 유산 ] 66

by 정원에

아이야.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그 짧은 30초를 기억하니? 혹은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스쳐 지나가는 간판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 찰나의 순간들은!

우리는 보통 그런 시간을 ‘버려지는-죽이는- 시간’ 혹은 ‘지루한 공백’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아빠는 요즘 그 30초를 영화의 슬로우 모션처럼 늘려보는 연습을 하고 있어. 지금 방금 스쳐 지나간 순간의 맛이 어떤지 음미하는 것이지.


엘리베이터 버튼의 차가운 금속성 촉감, 우리 코코꺼랑은 다른 옆집 강아지가 남기고 간 미세한 샴푸 냄새, 그리고 층별 도착 알림 소리의 차이, 층수가 변할 때마다 느껴지는 미묘한 공기의 무게감 같은 것들.

우리는 흔히 세상이 너무 빨라서 정신이 없다고 불평하지. 그런데 아빠가 조금씩 깨닫는 건, 세상이 빠른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삼키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어. 정보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그걸 제대로 씹어 맛보지 않으니 우리 영혼은 늘 허기에 시달리는 ‘영혼의 영양실조’ 상태에 빠지는 거야. 배는 부른데 마음은 텅 빈 느낌 말이지.


그래서 아빠는 이제 너희에게 돈이나 땅 대신, 조금은 세련된 ‘정신적 되새김질’의 기술을 물려주고 싶어. 소가 여물을 씹듯, 우리가 겪은 일상을 다시 꺼내어 씹고, 뜯고, 맛보는 숙고의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철학이지.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했다>는 말은 사실 틀린 말이야.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체험하지만, 그것을 ‘사유’라는 위장에 넣어 소화하지 않았을 뿐이지.


버스 창밖을 보며 느꼈던 이름 모를 쓸쓸함이나, 점심때 먹은 찌개의 칼칼함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의 그 감각을 단 한 문장으로라도 묘사할 수 있다면, 너희는 그 순간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거란다.


물론 요즘 이 ‘되새김질’이 쉽지 않아. 자꾸만 스마트폰의 짧은 영상들에 마음을 뺏기거든. 그래서 가끔은 너희에게 묻고 싶어. 너희는 그 빠르고 자극적인 세상 속에서 어떻게 너희만의 속도를 지키고 있니?


아빠가 너무 느리게 걷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될 때, 너희가 툭 던지는 사소한 농담이나 진지한 고민이 아빠에겐 가장 훌륭한 사유의 재료가 되곤 한단다.


삶의 지향점이라는 게 거창한 목표점에 깃발을 꽂는 일은 아닐 거야. 오히려 오늘 하루라는 접시 위에 놓인 평범한 순간들을 얼마나 정성껏 씹어서 내 피와 살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겠지. 아빠는 너희가 세상의 속도에 등 떠밀려 앙상하게 영혼의 뼈만 남은 사람이 되지 않길 바라.


대신, 사소한 30초에서도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느껴내는 ‘인생의 미식가’가 되었으면 좋겠다.지난 주 편지에서 했던 이야기지? 왜 또 한번 강조하냐면, 제대로 씹기만 하면 흙수저에서도 금맛이 나거든. 너만의 금맛을 자주 느껴보는 것, 그게 바로 제대로 된 미식가니까.

너희의 오늘 하루는 어떤 맛이었니? 아빠에게도 그 맛을 조금만 나눠주겠니?



p.s. [ 이번주의 통쾌한 미션 ]

어느 날 집에 오는 길, 가장 지루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신호등 대기, 편의점 줄 서기 등) 딱 30초만 ‘관찰 모드’로 전환해 봐.(옆 사람의 운동화 브랜드, 공기의 온도, 들리는 소리 3가지 포착!) 그러다 보면, 너만의 관찰의 맛이 느껴질거야. 영혼에 영양이 그득해지는 것이지!


라이팅 레시피6.jpg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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