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
이토록 귀하고 따뜻한 세계가 우리 옆에 있다.
운동을 하는 중에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어린이를 만났다. 강아지도 귀엽고 아이도 귀여워서 평소처럼 툭 반말로 인사를 던질 뻔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다잡고 존댓말을 사용했다.
“강아지가 너무 귀엽네요!!”
“만져봐도 될까요?”
“강아지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산책하기 어렵겠어요.”
친숙함이라는 이름으로 무턱대고 반말을 할 때보다 훨씬 기분 좋은 대화였다.
나는 교회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도 나는 무작정 반말을 하곤 했었다.
우와~ 진짜 멋지다. 이야~ 진짜 이쁘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너 정말 멋진 친구구나~
등등...
하지만 김소영 님의 에세이를 읽고 나서는, 처음 보는 친구들에게는 친구라고 부르지도 않고 반말도 하지 않는다.
오늘 입은 노란색 옷이 정말 이쁘네요.
오늘 예배는 재밌었나요?
다음에도 또 보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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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뭔가 반말로 다가가는 게 더 친숙한 느낌 아닌가? 내가 너무 존댓말을 하면 듣는 친구도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불편보다 더욱 소중한 그들의 마음을 위해 쉬워 보이는 길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조금의 언덕을 넘어가려 한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의 제주에서도 소영 님의 에세이가 생각이 난다. SNS에서 유명세를 탄 카페에 앉아서 사연을 쓰고 있는데, 5인 가족이 들어온다. 그들은 어른이 3명 아이가 2명이라고 말한다. 카페 사장님은 여기는 노 키즈 존이라고 말하며, 테이크 아웃을 권유한다.
여보 여기 노 키즈 존 이래
아.. 그래? 알아보고 올걸 그랬네.. 테이크 아웃하자..
.
..
엄마 노 키즈 존이 뭐야?
어린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야
..
..
나는 사실 소영 님의 에세이를 읽기 전에는 노 키즈 존을 찬성하던 입장이었다. 카페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는 것과 그것을 방관하는 보호자의 모습에 눈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세이의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세상을 마주했을 때는 어른의 권위 앞에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어린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혹자는 우리는 폭력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이가 사업성이 있다면 사장님들이 노 키즈존을 외칠 수 있을까? NO... 그들이 전혀 사업성이 없기 때문에 보다 당당하게 노 키즈 존을 써붙여 놓을 수 있는 것. 그런 권위를 사용한 잔잔한 폭력은 언제나 방향을 바꿔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어린이였던 것처럼.
이토록 찬란한 어린이라는 세계가 우리 옆에 있다.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 더 존중하자, 겸손은 우리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높이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