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듯 다른 사랑의 모양
비장애인인 당신과 청각장애인인 나. 우리의 숱한 만남 속에서 나는 당신과 내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낀 다양한 순간들을 마주했습니다.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마음이 간질간질한 날, 당신과 나란히 손잡고 걷는 동안 나의 시선은 말하는 당신의 얼굴을 향해 있었지만 당신의 시선은 앞을 향해 있었던 순간. 당신의 따뜻한 포옹 속에서 나는 등에 닿아있는 손끝으로 당신의 목소리를 느꼈고 당신이 건넨 말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포옹을 풀고 당신의 얼굴을 봐야 했던 순간. 늦은 밤 어두운 가로등 아래를 거닐며 당신과 분명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당신이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듣지 못해서 야속했던 순간. 나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는 당신의 전화 너머에서 당신의 말의 의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나 홀로 미지의 길을 걷던 순간. 그리고 마주 앉는 것이 편하다는 나의 대답과 나란히 앉는 것이 편하다는 당신이 한 대답의 순간.
'우리는 같은 하늘아래 같은 걸음 속에서 조차도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반면, 그 사람은 나와 같았습니다.
은은한 커피 향이 코끝을 휘감는 곳에서 나의 맞은편에 앉아 나란히 앉는 것보다 마주 보면서 서로의 표정과 손짓을 바라보는 것이 편하다고 대답하는 사람. 한 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부는 잔디밭 아래서 분홍빛 노을이 지고 짙은 별빛 천막이 내려앉았을 때 손을 밝혀줄 환한 불빛을 찾아 대화를 하는 사람. 벚꽃길 아래 떨어진 꽃잎들 사이를 자전거로 내달리는 순간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멈춰서는 것이 당연한 사람.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있어도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하느라 손에 든 휴대전화가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던 시간을 공유한 사람. 무엇보다도 나란히 걸을 때 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 나는 왼쪽이 들리지만 그는 오른쪽이 들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우리의 순간들은 늘 같은 방향을 향했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타인이 하는 말소리를 읽어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고 그들에게 나를 이해시킬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저 내가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알아왔던 지난 날들 속에서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편한 관계가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음성 언어가 기본인 비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수많은 세월 속에서 같은 듯 다른 사람들 틈에서 때로는 외로웠을 시간을 보낸 나와 그 사람은 이제야 비로소 서로의 외로움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고받는 눈빛과 바삐 움직이는 손짓과 또박또박한 입모양 틈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표현하는 우리만의 방법.
사랑하는 사람 손 잡고 걷다가 손 놓고 대화하는 것.
오랜 시간 전화기 붙들고 통화하지만 귀가 아니라 손이나 휴대전화 거치대가 뜨거워지는 것.
서로의 옆자리가 아니라 반대편에 마주 보고 앉는 것이 당연한 것.
안아줬다가도 다시 얼굴을 바라봐야 하는 것.
아무리 싫어도 얼굴은 보고 싸워야 하는 것.
어두운 조명이 은은하게 깔려있는 자리보다는 밝은 조명이 비치는 자리를 선호하는 것.
이것은 농인으로 사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1. 따스한 손을 맞잡고 가로수길 거닐며 나직하게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어느 연인들 틈으로 우리는 손을 놓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두 손이 자유로워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버스 탑승 후부터 하차할 때까지 내내 통화하는 사람들의 귀가 뜨거워지고 있을 때, 우리는 손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음성통화가 아니라 영상통화를 하기 때문입니다.
3. 식당을 방문했을 때 길게 늘어서있는 BAR 라인 자리에 딱 붙어 앉아 식사를 즐기는 당신들 곁을 지나치며 우리는 마주 보고 앉는 자리로 향합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해야 목이 덜 아프기 때문입니다.
4. 서로의 체온을 온전히 느끼며 연인을 오랫동안 안아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당신들의 반대편에서 우리는 몇 번이고 서로의 포옹을 풉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서로의 얼굴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5. 사소한 일에 화가 나서 큰 소리 오가다가 얼굴이 보기 싫어서 휙 돌아서도 뒤통수를 향해 목소리가 들리는 당신과 달리 우리는 아무리 보기 싫어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대화는 마주 볼 때 전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잔잔한 음악과 함께 어스름한 조명이 깔린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조용한 분위기를 즐길 때, 우리는 조금이라도 밝은 조명을 찾아 나섭니다. 어두운 곳보다 밝은 곳에서 사랑하는 이의 말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사는 당신과 나지만, 우리는 당신과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따스한 말을 건네는 당신의 방식, 따스한 표정과 손짓을 건네는 우리의 방식. 사랑의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사랑의 마음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만나는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면, 당신의 방식이 아닌 우리의 방식으로 그를 사랑해 보는 것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