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강아지와 나

by 모아진빛

혼자만의 시간이 편한 미혼에 무자녀, 엄마의 그늘 아래 살면서도 계획적으로 독립을 꿈꾸는 불효녀, 출퇴근만으로도 진이 쏙 빠져 초저녁부터 자리에 눕는 저질체력인 내게 '사랑'이라는 무거운 마음을 오래도록 쏟을 수 있는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과 사물, 풍경을 하나하나 넘겨보던 중 나는 오래지 않아 작고 보드랍고 사나운 나의 강아지를 떠올렸다.



내 강아지는 서너 살의 나이로 우리에게 왔다. 어려운 집안 상황에 등 떠밀리듯 첫 기간제 교사 생활을 시작한 2016년. 날카롭고 엄한 직장상사 아래 하루 종일 온몸에 힘을 주고 긴장만 하다 돌아오는 하루에선 그 어떤 즐거움이나 보람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저렇게 자연스럽게 일상 대화를 나누고 척척 일을 처리하는데, 나는 사회생활도 업무도 뭐 하나 잘 하는 것 없이 이 집단에서 겉돌고 있다는 생각에 하루 동안 내가 뱉은 말과 내가 한 행동을 반성하고 반추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설상가상 그렇게 퇴근해 돌아온 집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우울을 쌓아가던 그 해 여름, 나는 가족들 앞에서 반려동물을 키우겠다고 선언했고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는 내 각오에 엄마는 작은아버지 댁 베란다에서 짐짝처럼 지내는 강아지를 데려오자며 말을 꺼냈다. 예민하고 사나운 성격에, 작은아버지가 예전부터 키우고 있던 다른 말티즈 강아지한테까지 밀려 베란다 신세를 지고 있던 강아지는 이러한 이유로 2016년 9월 13일, 천안역에서 플라스틱 이동함에 담긴 채 우리에게 건네어졌다.

피부병으로 바짝 밀어버린 털, 긴장한 채 벌벌 떨고 있는 가느다란 뒷다리. 플라스틱 이동함의 얇은 틈으로 손가락을 넣어 이마를, 등을 쓸어주며 나는 내가 이 아이를 통해 받을 위안보다 내가 이 아이에게 줄 평안을 생각했다. 강아지에서 따온 '아지'라는 성의 없는 이름을 버리고 희망도 꿈도 사랑도, 무엇보다 돈도 많이 모이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모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해 이동함을 내려놓자마자 모아는 말 없고 서먹했던 온 가족을 자신을 둘러싸고 모이게 하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 신통방통한 존재에게 우리 가족은 간식이 먹고 싶다면 간식을 대령하고, 옷 입기가 싫다면 옷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나가고 싶다 눈치를 주면 산책을, 산책을 하다 걷기 싫다면 편안히 안아 옮겨주며 온 애정을 쏟았다. 그리고 그 결과 내 강아지는 12살 할머니가 된 지금도 자기주장 강하고 싫은 것은 절대 하지 않는 똑쟁이 고집불통 강아지로 함께 늙어가고 있다.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나 외의 다른 존재를 이 작은 강아지만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느낀다. 첫째, 내 강아지는 내 하루에, 무의식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집에서 가만히 누워있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책상에 앉아 학교에서 못다 한 업무나 수업을 준비하다가도 문득 '모아야-'하고 내 강아지를 부른다. 세수를 하다가도, 머리를 말리다가도, 심지어 모든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가고 조용한 교무실에 홀로 앉아 있다가도, 버스 안에서 딴 생각을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모아야'하는 이름이 새어 나온다. 그 중 30퍼센트 정도는 '모아야' 뒤로 '아이 예뻐~'가 자연스레 따라 붙기도 한다. 그리고 별안간 잠시 행복하다. 나는 내 강아지와 함께 있을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무심코 부르고, 무심코 예뻐한다.

둘째, 내 강아지는 게으른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내 강아지는 참 똑똑하고, 그래서 또 예민하다. 처음 집에 와 몇 번 배변 실수를 했던 것을 제외하면 집에서는 절대 용변을 보지 않으려는 건강한(강형욱 오피셜) 강아지이다. 용변은 꼭 밖에서만. 물을 많이 마셔 오줌이 마려워도 부들부들 떨며 참아내고, 장마가 계속되는 여름이면 3-4일 응가를 참기도 한다. 때문에 나는 하루 최소 두 번 이상 강아지를 산책시켜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영하 10도 안팎의 혹한기에도, 30도가 훌쩍 넘는 폭염기에도, 내 강아지는 배변패드는 용변을 보는 곳이 아닌 본인이 잠시 누워 쉬는 곳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궁극의 집순이로 집 앞 편의점에 가는 것조차 외출이자 스케줄이었던 나는 덕분에 매일 강아지와 함께 바깥 공기를 마시게 되었다. 예민하고 사나워 옷도, 우비도 입힐 수 없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나가 비가 오면 허리를 숙여 우산을 대주고, 눈이 오면 눈이 덜 쌓인 곳에 내려주고 다시 안아들길 반복하며. 내 강아지는 내게 절대 게을리 할 수 없는 책임인 것이다.

셋째, 나는 이제 강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표정만, 자세만, 서 있는 위치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엄한 얼굴로 현관문 근처에 서 있으면 용변이 마려우니 산책을 나가자는 것, 주변을 맴돌며 자꾸 건드리다 눈이 마주치면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것은 간식을 달라는 것, 밥을 주었는데 먹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것은 밥에 간식이나 고기를 섞어 달라는 것, 손이나 다리를 벅벅 긁는 것은 만져달라는 것, 그러다 으르릉하며 앞니를 보이는 것은 충분하니 그만 하라는 것, 곁에 누워 손을 빨기 시작하는 것은 졸리다는 것, 늦은 밤 텔레비전을 보느라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는 것은 이제 좀 자자는 것 등등.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진 않지만 나는 이제 내 강아지가 원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

넷째, 나는 내 강아지와 관련된 일이라면 강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10살 무렵, 내 강아지는 심장병 진단을 받았다. 나이 든 소형견들에게는 자주 발생하는 질병이라고 했다. 잘 놀다가 이상하게 켁켁거리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면 숨을 꺽꺽거리며 쉬는 게 이상해 검사를 해 본 결과, 동물병원의 친절한 의사선생님은 '심장병입니다-' 안타까워하며 진단을 내려주었다. 정 많은 둘째 동생은 이내 울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머리가 맑아졌다. 일종의 장녀병이랄까. 극 'F'성향으로 눈물이 많은 사람이지만, 내가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 일에는 돌연 차분하고 냉정해진다. 우는 동생 옆에서 나는 치료 방법, 몸에 좋은 음식, 영양제가 효과가 있는지 등 머리에 떠오르는 질문을 하나씩 물어보고 메모하며 해야 할 일, 사야 할 것들을 정리했다. 다행히 심장병은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더 심해지지 않게 약을 먹이며 경과를 지켜봐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 후 2년 동안 약값이 오를 때마다 한 달에 필요한 돈을 계산하고 갹출하여 지출하는 일은 나의 몫이었고, 12살이 된 우리 강아지는 여전히 팔팔한 모습으로 온 집안과 동네를 누비고 있다.

또 겁 많고 소심한 성격임에도 화를 참을 수가 없어졌다. 예민하고 사나운 만큼 의협심도 강한 내 강아지는 산책 중 자신의 곁을 지나는 오토바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왈왈 짖으며 오토바이를 저 멀리 쫓아버리고 나면 만족한 듯 콧김을 내뿜으며 발을 구른다. 호기심도 많아 어젠 없던 길가의 쓰레기,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꼭 멈춰 서서 조사를 하고 가야 한다. 그 때문일까, 나는 화가 많아졌다. 꼭 강아지와 함께 걷지 않더라도 인도를 지나는 오토바이에, 흡연 구역도 아닌데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침까지 뱉는 무개념한 인간들에게 화가 치밀고 욕을 참을 수가 없다. 제정신인가 진짜- 나는 매일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걷고 있다.

사랑은 참 신비롭다. 이제 나는 내 강아지뿐 아니라 다른 강아지에까지 애정이 샘솟는다. 길을 걷다가도, 버스 창밖을 바라보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주인과 함께 뽈뽈 걸어가는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주인의 발걸음을 맞추어 걷는 강아지들과, 그들을 위해 걸음을 늦추어 주는 주인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애틋하다. ‘아구 귀여워-’ 어린 아이를 귀여워하는 할머니처럼 오지랖을 부리며 나는 그 강아지들을 향해 가장 밝은 얼굴로 웃어 보인다.



이제 열두 살이 된 나의 작고 늙고 아픈 강아지 모아. 글을 적으며 그래서 내 온 하루와 온 세상은 내 강아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내 강아지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자 사랑해야 할 존재다. 자꾸 강아지 혼자 있으려는 시간이 길어지고 컨디션이 나빠 보이는 날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 사랑은 내 책임의 무게와 이해의 깊이를 바꾸며 나를 더 강하게 할 것이다. 10년 후, 20년 후, 그 어느 날에도 사랑할 나의 강아지. 주말을 앞둔 금요일의 늦은 밤, 나란히 늦잠을 자고 일어난 주말의 낮, 뜨끈뜨끈한 온기와 꼬수운 냄새를 풍기며 나를 바라보는 내 강아지의 눈빛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여기에 또 거기에 있다고 확신하게 해준다.


2024년 3월 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별을 준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