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지금 내 밑에 깔려 있는 온수매트는 결혼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가 준 것이다. 까맣게 모르겠지만, 남편보다도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내 비밀 애착물건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치매노인처럼 깜빡깜빡하는 연식이 되었다. 전원을 켜면 또르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켜졌다를 한 열댓 번 이상 반복해야 정상적으로 작동된다.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 다이얼을 돌리면 그때부터 다시 야심한 밤에 또르르 소리를 내며 껐다 켜졌다한다. 나는 매우 예민하니 건들지말아 달라고 극렬히 시위하는 것 같다. 온도가 너무 올라가면 더워서 이불을 다 차 내버리고서야 잠들거나 꺼버리게 된다.
하지만 이만 한 것도 없다. 수 번의 혹독한 겨울 동안 나를 지켜줬다. 결혼 전에는 보일러를 거의 때지 않고 살았다. 보일러가 없어도 무방한 듯 외출모드 또는 그보다 약간 높은 온도에서 살았다. 이불 밖이 워낙 추웠고 오직매트에만의지했기 때문에 38~40도에 맞춰도 그렇게 높다는 생각을 못했다. 지금, 23도에서 조금만 올라가도 더워 죽겠다 싶은 건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기 때문이다.
새삼 나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사치스럽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렇게나 풍요로운데 감사함이라곤 찾아볼 수가없다. 문득문득 생각한다.절대적인 기준에서 부자는 단언컨대 아니지만, 얼마나 예전보다 잘 살게 되었는가를말이다.
남편은 항상 얘기한다. 자기가 성남의 그 지하 동굴 같은 곳에서 나를 구해주었노라고.크게 반박할 말은 없다. 그 집은 낡고 웃풍이 세고 벽은 얇아 지나는 이들의 걸음과 얘기소리가 훤히 들리고 바람소리에 창문이 덜커덩거려 잠을 설칠 정도로 70년대에 그대로머물러 있었다.
처음 집을 보고 남편은 속으로 놀랬을 것이다. 잘 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풀옵션의신축 빌라였고 나는 엄마와 그 낡은 집에 살고 있었다. 어쩌면 남편이집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은 것이 속물은 아니니까 하고 결혼을 결심했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순수한 남편은 속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다. 평생 친구도, 평생 살 집도, 평생 입어도 다 못 입을옷도 있고 이렇게나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맘만 먹으면 하루 종일 책을 볼 수도 있고 훌쩍 떠날 수도 있다.아침잠을 더 잘 수도 있고온수매트가 필요없을 만큼 보일러를 절절 끓게 튼다. 그런데도감사함을 잊고 행복을 못 느낀다면 이치명적인 단점 때문일 것이다.
네이버 밴드에서 글쓰기모임을 함께 했던분이 며칠 뒤 영국으로 출국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후 밴드를 몇 번이고 들락거리면서 왜 출국 전에 만나지 않았을까 계속 자책하고후회했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곱씹으며 슬퍼하고아쉬워했다.그러다 퍼뜩, 나는 항상 없는 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떠나도, 함께 모임 했던 다른 분들과는 만날 수가 있다.
늘 없는 것만 신경쓰고 살았다.지금없는 사람,못다 이룬 꿈그리고 갖지 못한 물건, 기회, 관심,몸무게,체력등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마음 한 구석 아려했다.나를 보는 사람을 외면하고 등만 바라보는 사랑을 했던 '깊은슬픔'의 은서처럼 살아왔다. 지난 사랑에 집착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없는 것 말고 있는 것에 마음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