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숲 Dec 23. 2022

온수매트와 밴드

고백하자면, 지금 내 밑에 깔려 있는 온수매트는 결혼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가 준 것이다. 까맣게 모르겠지만, 남편보다도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내 비밀 애착물건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치매노인처럼 깜빡깜빡하는 연식이 되었다. 전원을 켜면 또르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켜졌다를 한 열댓 번 이상 반복해야 정상적으로 작동된다.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 다이얼을 돌리면 그때부터 다시 야심한 밤에 또르르 소리를 내며 껐다 켜졌다 다. 나는 매우 예민하니 건들지 말아 달라고 극렬히 시위하는 것 같다. 온도가 너무 올라가면 더워서 이불을 다 차 내버리고서야 잠들거나 꺼버리게 된다.


하지만 이만 한 것도 없다. 수 번의 혹독한 겨울 동안 나를 지켜줬다. 결혼 전에는 보일러를 거의 때지 않고 살았다. 보일러가 없어도 무방한 듯 외출모드 또는 그보다 약간 높은 도에서 살았다. 이불 밖이 워낙 추웠고 오직 매트에만 의지했기 때문에 38~40도에 맞춰도 그렇게 높다는 생각을 못했다. 지금, 23도에서 조금만 올라가도 더워 죽겠다 싶은 건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기 때문이다.  


새삼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사치스럽게 살고 있다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렇게나 풍요로운데 감사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문득문득 생각한다. 절대적인 기준에서 부자는 단언컨대 아니지만, 얼마나 예전보다 잘 살게 되었는가를 말이다.

남편은 항상 얘기한다. 자기가 성남의 그 지하 동굴 같은 곳에서 나를 구해주었노라고. 크게 반박할 말은 없다. 그 집은 낡고 웃풍이 세고 벽은 얇아 지나는 이들의 걸음과 얘기소리가 훤히 들리고 바람소리에 창문이 덜커덩거려 잠을 설칠 정도로 70년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처음 집을 보고 남편은 속으로 놀랬을 것이다. 잘 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풀옵션의 신축 빌라였고 나는 엄마와 그 낡은 집에 살고 있었다. 어쩌면 남편이 집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은 것이 속물은 아니니까 하고 결혼을 결심했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순수한 남편은 속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다. 평생 친구도, 평생 살 집도, 평생  입어도 다 못 입을 옷도 이렇게나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맘만 먹으면 하루 종일 책을 볼 수도 있고 훌쩍 떠날 수도 있다. 아침잠을 더 잘 수도 있고 온수매트가 필요없을 만큼 보일러를 절절 . 그런데도 감사함을 잊고 행복을 못 느낀다면  치명적인 단때문일 것이다.




네이버 밴드에서 글쓰기모임을 함께 했던 며칠 뒤  영국으로 출국한다는 글을 올렸. 이후 밴드를 몇 번이고 들락거리면서 왜 출국 전에 만나지 않았을까 계속 자책하고 후회했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곱씹으며 슬퍼하고 아쉬워했. 그러다 퍼뜩, 나는 항상 없는 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떠나도, 함께 모임 했던 다른 들과는 만날 수가 있다. 


늘 없는 것만 신경 쓰고 살았다. 지금 없는 사람, 못다 이룬 꿈 그리고 갖지 못한 물건, 기회, 관심, 몸무게, 체력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마음 한 구석 아려했다. 나를 보는 사람을 외면하고 등만 바라보는 사랑을 했던 '깊은 슬픔'의 은서처럼 살아왔다.  지난 사랑에 집착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없는 것 말고 있는 것에 마음을 써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예민이와 잔소리쟁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