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임상혁과 박찬영이 떠난 회사는 고요하고 적막했다. 박찬영은 미국 실리콘 밸리로 갔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임상혁에 대한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그 꿈을 요즘 들어 다시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그는 반복적으로 칼을 맞고 선홍빛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나는 그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회사와 친구와 가족 같았던 동료들을 잃은 그의 존재 의미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싸가지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싸가지의 부재도 두려웠지만 싸가지가 코털과 나를 의심할까 봐 더 두려웠다. 나는 코털을 믿었다. 그도 나만큼 유비쿼터스라는 회사와 유비쿼터스 사람들을 좋아한다.
“도대체 본사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나와 함께 있을 때 코털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주주총회 이후 나를 배제하고 매주 했던 본사와의 미팅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이재영이 들어온 유비쿼터스는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되어갔다. 특유의 활기참과 재기 발랄함은 사라지고 대기업의 관료 문화가 회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영어 이름은 금지되었고 철저한 직급제가 적용되었다. 아무리 중요한 의사결정이라도 3단계만 거치면 되었던 수평적 조직이 수직적 조직으로 바뀌면서 결제선이 많아졌다. 과거에 톡으로 의사결정했던 사항을 장문의 보고서와 대면 보고로 의사결정을 받아야 했다. 이재영은 금액이 아무리 적어도 자신이 결정하겠다면서 집행 예정인 모든 투자와 비용 항목을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과거 의사결정했던 사항도 본인이 다시 검토하겠다면서 임상혁과 박찬영이 준비했던 사업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하나둘 씩 이재영이 만든 사업구조조정 TFT에 불려 가 당시에 왜 이런 의사결정을 했는지 심문당했다. 사업구조조정 TFT에서는 올바른 결정을 하기보다는 꼬투리를 잡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반발하는 직원들은 엉뚱한 부서로 발령을 받았고 할 수 없이 퇴사하는 수순을 밟았다. 더 이상 자신들이 사랑했던 회사가 아닌 유비쿼터스를 떠나는 그들의 모습에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난장판 같은 회사 분위기에서 이재영이 가장 챙기는 부서는 빅 데이터 사업본부였다. 회원들의 기본 정보뿐 아니라 ‘커넥팅’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을 측정하고 분석하는 부서다. 빅 데이터 본부는 이재영의 직속 부서로 승격했고 이재영이 대형그룹에서 데리고 온 심복을 본부장으로 앉혔다. 그들은 포식자 밑에서 기생하는 조직으로 조금씩 조금씩 커져갔다. 코털이 담당하고 있는 재무실 역시 안전지대였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부서이동을 하는 직원들이 많았지만 재무실 직원들은 고요했다. 본사에서 파견된 코털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재무실내 다른 직원들과 달리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하루하루 삭히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유비쿼터스 투자제안 보고서를 쓰지 않았더라면, 아니 임상혁의 은밀한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날마다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재미있고 즐겁게 세상을 바꾸겠다는 친구들의 꿈을 짓밟아버린 것만 같았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이럴거면 왜 이 회사에 투자했을까? 이재영에게 왜 이러느냐고 달려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애꿎은 코털만 주인의 눈치를 보는 애완견처럼 매일 씩씩거리는 내 눈치를 살살 보면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