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와 큰 외숙모

삶의 단상 /

by 가야

옥수수는 간식으로 때로는 주식으로 우리와 함께 해왔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 고향에서는 옥수수를 강냉이라고 불렀다.


강냉이는 끌 강냉이와 찰 강냉이로 나뉜다. 끌 강냉이는 찰기가 없어 옥수수로 밥에 섞거나, 죽을 끓여 먹는 용도였고, 찰 강냉이는 찰기가 있어 사람들이 좋아하는 옥수수다. 수확 시기가 빠른 것을 올 강냉이, 조금 늦게 먹는 옥수수는 끌 강냉이(?)라고 불렀다.


이 말이 정확하지는 않다. 내 기억 속의 단어들은 표준말과 조금씩 다른 경우가 매우 많다. 가령 '삼이웃이 떠들썩하다'란 말을 '삼유시가 떠들썩하게'라고 했으며, 가위를 가세라든지 하는 등이다. 여하튼 고향은 국민학교 1학년까지의 기억이 전부인지라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SE-388ecdf5-a7a7-47f3-a9f8-37b9a920ad6c.png?type=w1

내 기억 속 첫 번째 옥수수는 텃밭에 있었다. 밥을 안치기 전 엄마는 잘 익은 옥수수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수염을 떼어낸 뒤, 쌀 위에 얹었다. 밥이 익어가면서 옥수수는 덤으로 쪄졌는데, 대부분 음식을 이런 식으로 조리했던 것 같다. 호박잎을 찔 때, 밀가루에 버무린 애동 고추를 찔 때도, 귀한 계란찜을 할 때도, 새우젓을 찔 때도 마찬가지였다. 감자나 고구마를 삶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밥알이 덕지덕지 묻어있던 옥수수나 감자, 고구마는 우리들의 소중한 간식이었고, 맛 또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한동안 옥수수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다시 옥수수가 등장한 것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방학을 맞아 엄마와 함께 고향에 갔다.


그때 큰 외숙모가 전주에서 시누이와 조카가 왔다며 토종닭을 잡아 백숙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찰 강냉이를 삶아준다며 강냉이 꺾으려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꺼이 큰 외숙모 말에 동의를 하였고 따라나섰다. 산 밑에 있는 커다란 밭에 온통 내 키보다 훨씬 큰 옥수수나무로 가득했다. 나는 옥수수가 그렇게 많고 키가 큰 것에 경이롭기까지 했는데, 큰 외숙모가 씩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20210717%EF%BC%BF112115.jpg?type=w1

"이렇게 맛난 강냉이는 조선 팔도에 없다. 덕유산에서 큰 것이라야 크고 맛도 좋지."


엄마도 외숙모도 외삼촌도 덕유산이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알고 계셨다. 조선이 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우리나라를 조선 팔도라고 불렀다. 큰 외숙모 말처럼 조선 팔도에서 제일 맛있다는 찰 강냉이는 우선 크기부터 달랐다.


당시 전주에서 내가 먹어본 옥수수는 길이 15cm 내외의 노란 옥수수였는데, 큰 외숙모네 밭에서 꺾어온 옥수수는 내 팔뚝만큼 컸고 흰 옥수수였다.

20210717%EF%BC%BF112715.jpg?type=w1


외숙모가 저녁 가마솥에 밥을 하면서 밥 위에 쪄준 옥수수는 정말 차지고 쫀득쫀득하면서 맛이 있었다.


"어뗘 맛있자? "


큰 외숙모를 보며 난 입안 가득 옥수수 알을 물고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외삼촌 내외는 당시로는 드물게 옥수수를 대량으로 키우셨는데, 그 이유를 나중에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옥수수를 꺾어다 삶아서 차부(버스터미널)에서 팔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지금의 덕유산 국립공원 안 산속에 있던 외갓집을 6.25 전쟁 때 인민군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경찰과 군인들이 불을 질렀다. 당장 살 곳이 없어 산에서 내려와 안성장터에 방한 칸을 얻어 살게 되었다고 했다. 장남이었던 큰 외삼촌은 화병으로 드러누운 할아버지를 대신해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생활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로는 드물게 옥수수 농사를 지어 직접 삶아 팔기까지 했던 것이다.


옥수수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났다.


나는 앞으로 옥수수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써야 한다. 그 이야기는 아픈 추억이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keyword
이전 07화여름의 추억 / 익모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