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
옥수수는 간식으로 때로는 주식으로 우리와 함께 해왔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 고향에서는 옥수수를 강냉이라고 불렀다.
강냉이는 끌 강냉이와 찰 강냉이로 나뉜다. 끌 강냉이는 찰기가 없어 옥수수로 밥에 섞거나, 죽을 끓여 먹는 용도였고, 찰 강냉이는 찰기가 있어 사람들이 좋아하는 옥수수다. 수확 시기가 빠른 것을 올 강냉이, 조금 늦게 먹는 옥수수는 끌 강냉이(?)라고 불렀다.
이 말이 정확하지는 않다. 내 기억 속의 단어들은 표준말과 조금씩 다른 경우가 매우 많다. 가령 '삼이웃이 떠들썩하다'란 말을 '삼유시가 떠들썩하게'라고 했으며, 가위를 가세라든지 하는 등이다. 여하튼 고향은 국민학교 1학년까지의 기억이 전부인지라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내 기억 속 첫 번째 옥수수는 텃밭에 있었다. 밥을 안치기 전 엄마는 잘 익은 옥수수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수염을 떼어낸 뒤, 쌀 위에 얹었다. 밥이 익어가면서 옥수수는 덤으로 쪄졌는데, 대부분 음식을 이런 식으로 조리했던 것 같다. 호박잎을 찔 때, 밀가루에 버무린 애동 고추를 찔 때도, 귀한 계란찜을 할 때도, 새우젓을 찔 때도 마찬가지였다. 감자나 고구마를 삶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밥알이 덕지덕지 묻어있던 옥수수나 감자, 고구마는 우리들의 소중한 간식이었고, 맛 또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한동안 옥수수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다시 옥수수가 등장한 것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방학을 맞아 엄마와 함께 고향에 갔다.
그때 큰 외숙모가 전주에서 시누이와 조카가 왔다며 토종닭을 잡아 백숙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찰 강냉이를 삶아준다며 강냉이 꺾으려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꺼이 큰 외숙모 말에 동의를 하였고 따라나섰다. 산 밑에 있는 커다란 밭에 온통 내 키보다 훨씬 큰 옥수수나무로 가득했다. 나는 옥수수가 그렇게 많고 키가 큰 것에 경이롭기까지 했는데, 큰 외숙모가 씩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이렇게 맛난 강냉이는 조선 팔도에 없다. 덕유산에서 큰 것이라야 크고 맛도 좋지."
엄마도 외숙모도 외삼촌도 덕유산이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알고 계셨다. 조선이 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우리나라를 조선 팔도라고 불렀다. 큰 외숙모 말처럼 조선 팔도에서 제일 맛있다는 찰 강냉이는 우선 크기부터 달랐다.
당시 전주에서 내가 먹어본 옥수수는 길이 15cm 내외의 노란 옥수수였는데, 큰 외숙모네 밭에서 꺾어온 옥수수는 내 팔뚝만큼 컸고 흰 옥수수였다.
외숙모가 저녁 가마솥에 밥을 하면서 밥 위에 쪄준 옥수수는 정말 차지고 쫀득쫀득하면서 맛이 있었다.
"어뗘 맛있자? "
큰 외숙모를 보며 난 입안 가득 옥수수 알을 물고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외삼촌 내외는 당시로는 드물게 옥수수를 대량으로 키우셨는데, 그 이유를 나중에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옥수수를 꺾어다 삶아서 차부(버스터미널)에서 팔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지금의 덕유산 국립공원 안 산속에 있던 외갓집을 6.25 전쟁 때 인민군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경찰과 군인들이 불을 질렀다. 당장 살 곳이 없어 산에서 내려와 안성장터에 방한 칸을 얻어 살게 되었다고 했다. 장남이었던 큰 외삼촌은 화병으로 드러누운 할아버지를 대신해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생활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로는 드물게 옥수수 농사를 지어 직접 삶아 팔기까지 했던 것이다.
옥수수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났다.
나는 앞으로 옥수수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써야 한다. 그 이야기는 아픈 추억이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