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선택으로 이렇게까지 인생이 달라질 줄 몰랐다. 물론 학교 선택 때문만은 아니다. 난 이제 당시 비자가 너무 늦게 나와서, 원래 비행기를 취소하고 학기 시작하기 바로 며칠 전 비행기로 바꿨던 것까지 하늘의 뜻처럼 느껴진다. 걔랑 같은 날이었든지 비슷한 날에 영국에 도착했다. 원래도 전형적인 한국인 힘들어해서 유학 간 것이라, 런던이 아니니 더 한국인 없어서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이 도시에도 한국인이 있나 궁금했다. 하지만 예정대로 비행기를 타서, 걔가 도착해서 친구를 찾을 무렵엔 이미 영국이 익숙해진 상태였다면 어땠을까. 관심 없었을 수도 있다. 당시 이제 도착한지 사흘이라, 아직 친구가 없었다. 같은 도시에 같은 학교를 다니며 살았어도, 충분히 모르고 지나갔을 수 있다.
5년 동안 1곡 썼던 내가, 한 사람 때문에 16곡을 쓴 것만으로도 이미 음악 인생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된다. 돈이 많이 들어서 원래는 1년에 한두 곡 냈는데, 그 16곡 중 이미 6곡을 발매했다. 노래 잘 들었다고, 걔가 자연스럽게 연락해 올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건 아주 새발의 피다.
작년 하반기 내내 힘들어했던 것마저도 다 의미가 있다. 그래서 버티다 못해 정신과를 새로 찾았고, ADHD 진단을 받았으니까. 과거 부작용으로 살이 엄청 쪘어서 정신과도 어지간히 극혐 했었는데, 엄마 친구 소개받은 병원이라 한 번만 믿고 갔었다. 걔 아니었으면 그렇게 기절하게 괴로울 일이 없어서, 앞으로 계속 ADHD인 줄도 모르고 살았을 거다. 그럼 평생 자기혐오와의 싸움이다. ADHD인 걸 모르면, 자기 자신이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다. 수 년간 상담으로도 증상이 근본적으로 고쳐지질 않아서 답답해했다. 그런데 고치고 말고 문제가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이제야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고, 내 뇌가 타고난 강점과 약점을 알게 되고, 나 같은 사람이 전세계에 5%가 있단 것을 알게 됐다. ADHD 진단 전과 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다르다.
인간관계와 사랑 또한 너무 힘들었지만 스파르타로 배워서 지금 단계가 되었다. 나를 아낄 줄 아는 그 베이스가 생겼다. 그게 먼저 바로 서야 했다. 그래야 나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바로 알아보고 멀리하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만 가까이하고 살 수 있다. 잘못된 사람들에게 쏟은 시간과 감정의 낭비는 정신 건강을 해치고,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일과 커리어에 쓸 에너지를 빼앗아간다. 이제 엔진을 제대로 갈아끼운 셈이다. 걔가 결혼했거나 정말 나는 아니라고 말해주면, 이젠 한두달 짝사랑이나 연애할 필요 없이 좋은 사람을 잘 만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솔직하게 글 쓰는 걸 좋아했다한들, 올해는 브런치의 해였다. 7월 24일에 글이 600편이었는데, 10월 6일에 900편이 되었으니, 두 달 반 동안 300편을 썼다. 작년, 재작년에도 꾸준히 써왔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표현력도 늘고, 문장이 휘청이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선 느낌이다. 글로써 성장하고, 성장하며 글이 나오게 되었다. 그 선택 하나가, 영향을 안 미친 분야가 없다.
참으로 죽을 때까지 못 잊을, 태어나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