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기제
무의식 속에 강한 분노를 가지고 있어도, 충분히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얘를 탓할 수도 있었다. 1월에 리사이틀 다 죽어가며 준비하고, 2월엔 한국 간다고 생난리를 쳤다. 진짜로 짐 싸서 당일 비행기 타려는 거 오빠가 말려서 진정된 적이 있다. 당시 오빠는 알게 된 지 2주쯤 되었던가. 3월엔 돈을 왕창 날리면서까지 한국에 갔다. 3-4월을 그렇게 한국에서 보내고, 6월에 다 접고 돌아왔다. 걔만 아니었으면 1월부터 안 힘들었고, 그럼 2월에 생난리도 안 치고, 3월엔 한국에 가지도 않았다. 그중에서도 작년 6월 말에 돌아와서 12월까지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를 보냈다. 7월부터 9월까지는 매일 내지는 이틀에 한 번꼴로 울었다. 작년 1월부터 한 해 전체가 다 꼬였던 셈이다. (4월 말부터 6월 초까지만 제외다.)
그런데 지금 위 문단을 쓰면서도 놀랐다. 너무 사실인데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나는 감사하게도 당시 어떤 곡들을 썼는지를 생각했다. 1월엔 '사랑해', 2월엔 미발매 곡들, 4월엔 '아직, 너를'을 썼다.
본능적으로 '승화'를 강조한다. 내가 얼마나 고통을 창작으로 바꾸는지 상당히 자주 말해왔다. 단순하게 '고통, 슬픔, 상실감, 화'만을 얘기하지 못하고, 항상 그 뒤에가 먼저였다. '얻은 게 있잖아요. 음악인으로 성장했잖아요. 곡 원래 하나도 안 나오던 사람인데 감사한 거죠.'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해결해야 될 감정을 뒤로 젖혀두는 셈이 아닌가. 표면적으로 아주 건강하고 성숙한 방식인데, 자꾸 나도 모르게 그걸 강조하게 되면 회피, 억압이다.
문득 작년 상반기에 이뤘던 모든 성취 뒷면에 강한 분노가 있었단 것도 떠올랐다. '걘 어차피 집, 학교,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할 텐데, 내가 더 멋지고, 즐겁게 유학 생활한다'하는 이 악물기가 있었다.
사랑하니까 분노를 느껴선 안 된다고 생각하니 무의식에 분노가 완전히 감춰지는 거,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영국 가기 전에 한 번 경험했다. 정말 팬이었던 연예인이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렇게 용두사미로 끝나기도 어렵겠다. 유학 가기 전 그 몇 달을, 유학 생각은 거의 안 하고 하루 종일 거기에 바쳤다. 영국 가는 게 하나도 안 중요하게 느껴졌었다. 비행기 타기 직전까지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완전한 착각이었고 환상이었다. 그걸 주관하던 동업자가 사기꾼으로 밝혀졌다. 연예인을 등에 업고,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나 같은 참여자들은, 그 연예인과 함께 동등한 자리에서 일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믿었다. 그 어떤 것도 경력이 확실한 게 없었다.
내가 바랐던 건 정말 한마디라도 전달받는 것이었다. 팬으로서 한 행동이면, 답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만, 당시 그 자리는 연예인이기 전에 '대표'였다. 그 동업자 때문에 뻔히 순진한 애들이 낚여서 시간과 에너지 낭비한 거 알았을 거다. 설령 경제적 피해는 없었다 하더라도, 당시 나는 모든 걸 다 바치며 준비했었다. 나중에 설령 사과를 듣게 되더라도 어정쩡한 웃음을 지을 것 같다.
그 당시, 6개월 동안 그 연예인의 이름을 아예 부르지 못했다. 반드시 초성이나 다르게 불러야 했다. 유튜브에 나오면 분명 팬이니까 궁금하고 보고 싶은데, 막상 클릭해도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막만 보게 되었다. 그게 '강력한 분노가 뒤에 숨어있다는' 신호였다. 지금은 아예 유튜브에 뜨면 관심 없음을 눌러버린다. 언급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너무 순진했고, 사기꾼은 그 점을 이용했고, 연예인은 책임졌어야 하는 부분을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내가 이름을 못 부르면 뒤에 강한 분노가 있구나'하고 깨달았다. 작년 하반기 내내 오빠에게 그를 신찬성으로 불렀다. 김현우와 김연지는 본명으로 잘만 부르면서, 얘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더 전생 체험하고 깜짝 놀랐다.)
안타깝게도 이 '강한 분노'가 뒤에 숨어있던 건, 상대방들로부터 직접 사과를 듣지 않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그 연예인이 나오면 채널을 돌릴 것이고, 두 사람 다 이름을 입에 올리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