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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사랑받은 기억밖에 없네요

최면 치유 상담

by 이가연

지난번 전생 체험은 그냥 체험이었다면, 이번엔 다른 센터에서 정말 '심리 치료'를 위해 최면 상담을 찾았다. 유명한 센터인지 예약하고 한 달 넘게 기다렸다.


나는 분명, 작년 1월과 2월에 겪은 사건에 대한 치유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근래엔 괜찮아졌지만, 지난 1년 반 동안 나는 상처받은 말을 수없이 곱씹으며 상처받았다고 그걸 치유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최면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걔가 상처 주는 말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다. 학교 공연장이 떠올랐다. 나는 무대 위에 있었고 의상은 지난번 강릉 무대 그대로였다. 그리고 객석에 걔 모습을 선명히 봤다. 무대 기준 왼쪽 뒤에서 두세 번째쯤 구석이었다. 혼자 앉아있었다.

둘이서 얘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나와보라고 하셨다. 공연장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선생님이 그 벤치에서 서로 뭐라고 얘기하는지 말하도록 유도하셨다. 걔가 어떤 모습인 거 같냐고 하시니 "무뚝뚝해요. 경상도새끼"라고 해서 웃으셨다. 내가 지금 최면 중에 머릿속에 울리는 음성은 걔 목소리와 말투 그대로 사투리인데, 나 본체는 그 사투리 구현이 안되니까 좀 웃겼다.

쭉 말하다가 갑자기 걔가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작년 1월에 느낀 그 입 밖으로 검붉은 피, 심장을 토해내는 느낌을 또 느꼈다. 피 다 튀긴 느낌이 들었다. 너무 괴로워서 가슴을 막 치고 몸부림쳤다.

이번엔 걔가 막 벤치에서 여전히 앉은 채로 엉엉 울었다. 분명 나보다 걔가 주변 사람 눈치 엄청 보던 놈이었는데, 주변에 백인들 지나다니는데도 오히려 내가 눈치 봤다. 걔는 막 울고 내가 어깨 토닥여주며 달래주고 있었다. 내가 엄마 같았다. 그러니 또 그 검붉은 심장을 토하는 느낌이 또 들었다. 걔가 아파하는 걸, 내가 그대로 다 받아서 아픈 느낌이었다.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최면 상태이니, 눈물은 다 선생님이 닦아주셨다. 정말 문자 그대로 '검붉은 심장을 토하는 느낌'이다. 그건 작년 1월 이후로 안 겪었는데, 최면에서 사실 그럴 줄 알았다. 그걸 각오하고 갔다. 선생님은 계속 몸 이곳저곳 톡톡톡 두드려주시고 따뜻한 확언의 말을 해주셨다.

최면 막판에는 계속 웃었다. 영국 캠퍼스나 쇼핑몰을 떠올려도 웃고, 그냥 방을 떠올려도 웃었다. 공연장 앞 벤치에서는 그 앞 중국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갔다. 마주 앉아서 밥 먹는데, 걔는 아까 울어서 쪽팔려서 다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밥 다 먹고는 그 앞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2층 올라가기 귀찮으니 1층에 나란히 앉아서 갔다. 그 뒤론 중간중간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행복해했다.

사실 처음에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에서, 여자를 그렇게 잘 다루고, 바람둥이었던 거 아니냐고 하셨다. 최면 끝나고 선생님이 미안하다고, 잘 몰라서 실수했다고 사랑받은 기억밖에 없다고 하셨다. 2시간 40분 동안, 나도 정말 많은 말을 했고, 선생님도 많은 말을 하셨지만 정말 그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사랑받은 기억밖에 없네요.' 최면 중에는 실제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린 게 아니라, 그냥 무의식의 흐름을 쭈욱 따라갔다. 그랬는데 정말, 상처는 전혀 없고 사랑뿐이었다. 최면 중에 걔가 "내 밖에 없다는 게 말이 되나!"하고 막 역정을 내는 것도 있었지만, 그런 것도 다 진심이 아니라 마음이 다 느껴졌다.

그동안 의식은 '상처받은 기억'을 떠올렸을지 몰라도, 내가 너무 알았던 거다. 말만 그렇게 했다는 걸. 왜냐, 가족에 그 답이 있기 때문이다. 공대라든가 나를 통제하려고 했다든가 겉으로 보이던 것을 통해 둘이 똑같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었으니, 그건 사랑을 표현받아본 적이 없어서 표현할 줄 모르는 것, 진심이 아닌 말 하는 것, 꽁꽁 싸매져 있어서 얼핏 보면 겉과 속이 달라 보이기 때문에 그걸 잘 들여다봐야 보이는 것이었다.

최면이 끝나고 의자에 앉아서, 하늘이 걔를 나에게 왜 보냈는지 알겠다는 얘기를 나누며 상담을 마쳤다.

끝나고 내가 한 말을 이렇게 정리해서 공유도 해주셨다. 질문은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 하셨다. 내 앞에 있는 수호신이 나에게 뭐라고 할 거 같냐고 물으시면, 수호신이 되어서 말이 줄줄 나왔다.


위의 말은 전부 최면 중에 내가 한 말이다.

선생님은 "힘든 순간들이 마음에 깊이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사실은 그만큼 크고 귀한 사랑을 받으셨던 건 아닐까요?"라고 하셨다.



마음의 여유가 된다면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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