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 이야기

오역하는 말들

황석희 에세이 / 북다 출판사

by 이가연

p45 일일이 펼쳐서 제목으로 적는 게 궁색하긴 해도 한 줄, 한 줄 쌓아 가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했다고. 사실 웃을 일이 없던 시절이다. (중략) 가장 최악인 건 이 생활을 몇 년을 더 해야 할지 아예 모른다는 거였다.

- 이 대목을 보자마자 내 홈페이지가 떠올랐다. 나는 거기 써있는 내 이력을 그대로 줄줄 읊을 수 있다. 그 정도로 뭐가 얼마 없다. 그래도 이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 나 역시도, 발매곡이 열 곡이 넘는데 저작권료 한 달 3백 원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할지 모르겠다.


p47 나에 대한 의심이 들 때면 허겁지겁 컴퓨터 폴더를 뒤져 그 페이지를 찾아 읽었다. (중략) 대단할 것 없는 경력이었지만 한 줄씩 빼곡히 내 경력이 적힌 페이지를 보면 그제야 불안이 가라앉았다. (중략) 분명 계획대로 뚜벅뚜벅 가고 있으면서도 가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며 의도적으로 내 여정을 오역했다.

- '역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싶었다. 계속 지원하면 뭐라도 붙는다는 증거니까. 여기서 나와 작가가 다른 지점은 있다. 나는 한 번도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포기하고 싶던 적이 없다. 그동안 이건 그냥 내가 당장 생계 걱정이 없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다른 환경이었어도, 생활비를 벌면서 그 돈으로 계속 앨범 내고 공연해왔을 것이다. 나도 '남들보다 쉬운 환경이라며' 내 노력을 오역했다.


p48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대단한 위로나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라 실질적인 증거다. (중략) "기록이 보여 주리라. 내가 버텨 왔음을" 프랭크 시나트라도 <My Way>에서 불렀듯이 내게 보여 줄 기록이 필요하다. 아무리 볼품없더라도 작은 증거들을 모아 가기를. 애써 바둥거려도 나 혼자만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인 것 같을 때, 그 결정적인 자학의 순간에 그것들이 내 최후의 버팀목이 될는지도 모르니까.

- 하긴 누군가가 '괜찮아. 언젠가는 너도 유명해 질거야. 화이팅'하면 전혀 와닿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영국에서 석사도 졸업했고, 6개 국어도 하잖아. 그런 가수는 한국에 한 명도 없잖아. 유명해 질 거야.' 하면 와닿는다. 나에겐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료 화면으로 나갈 졸업장과 각종 자격증, 공연 사진이 있다. 생각해보니 나는 볼품없지도, 작지도 않은 증거들인 거 같다. 때론 '똑같이 석사 졸업한 애들 중에 나 혼자만 돈 못 벌고 있겠지?'싶어서 자학의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 중에 유학 생활로 책 쓴 사람 한 명도 없다.


p140 저때만 해도 잠깐만 저렇게 찌질하면 될 줄 알았지. 겉이라도 허우대 멀쩡한 직업인인 척하기까지는 저기서 4년이 더 걸렸다.

- 남들은 '서른'을 기준점으로 두고 생각할텐데, 나는 나이 제한 없이 계속 이렇게 공연팀 지원 두드리고 살 거다. 그러고보니, 나와 같은 97년생들은 내년이 오는 걸 두려워할 수 있겠구나. 한국 나이를 생각 안 하고 살아서 새삼 이제 알았다. 한국인 친구가 한 명도 없으니 이런 건 너무 좋다. 난 32살까지는 이러고 살 거다. (한국 나이로 34살이겠지.) 원래 집에서도 30살까지 지원해준다고 했다. ADHD 진단으로 뇌가 남들보다 늦게 발달한다는 걸 알았으니 더 늦게까지 지원해줘야하는 것이 맞다...


p175 실제론 그렇지도 않으면서 덮어놓고 결혼이 인생의 무덤인 것처럼 장난스레 말하는 것은 배우자에 대한 모독이자 당신이 한 서약에 대한 모독이다. 그것도 내 배우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는 아주 질 나쁜 모독. 결혼을 고민 중인 분들은 주위에서 하는 경박한 이야기들 듣지 말고 (중략)

- 어차피 나랑 결혼할 사람은 나와 생각도 똑같을 뿐더러, 똑같이 친구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걱정이 안 된다. 지난 1년 동안 힘든 시간을 겪고 느낀 점이 있다면, 우리 아빠가 상위 1%고, 우리 동생도 마찬가지고, 나도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란 자고로 그 나머지 99%라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영국 오빠는 거듭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에 준하는 훌륭한 사람이다. 영국인 친구는 영국인이다. 가치관의 뼈대부터 한국과 다르다. 아무리 봐도, 가치관 맞는 사람 만나려면 외국인과 결혼해야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한국에 나 같은 사람도 존재하는데 나랑 똑같은 사람이 또 없겠나. 어차피 결혼은 한 명이랑 하는 것이고, 여러 명 있을 필요도 없다. 가족, 친구 두 명, 배우자, 나 자신의 말만 듣고 살 거다.


p199 아마 진심이 아닐 거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제외한다면 내 자식의 부모가 아니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는 부모는 없다.

- 예전에 엄마 왈, 아빠가 자식 낳은 게 인생에서 제일 후회되는 일이었다고 했다고 해서 굉장히 상처받아 상담사에게 말한 적이 있다. (상담사 왈, 그런 전혀 할 필요 없는 말을 자식에게 하는 거 보니 엄마도 ADHD 성향이 의심된다고 했다.) 이번 생은 '진심이 아닌 말을 뱉는 나와 똑같은 족속들'을 이해하는 과정 같다. 그 첫번째가 가족이었고, 가족이 슬슬 되니까 두번째로 가족이 아닌 사람도 어디 한 번 이해해보라고 하늘이 던져주셨던 거 같다. 근데 그거 별 거 없었다. 새삼 말하려고 하니 상당히 오글거리는데, 사랑하는 마음이면 되었다.


p279 "아직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그저 온기를 나누고 온기를 느끼는 법을 잠시 잊은 것뿐이야. 조금만 더 믿어봐." 내 무의식이 말하는 것만 같다.

- 내가 한국인 비하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고, '얘는 한국 사람을 싫어하는구나'하면 참으로 끔찍한 오역이다. '이 사람은 한국인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고, 영국인에게 치유를 많이 받아봤구나' 의역해야 한다. 좋은 사람들이 국적 상관 없이 많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영국에서 나쁜 사람 못 만나본 거고, 한국에서 좋은 사람 많이 못 만나본 거 아주 잘 안다.


나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아주 잘 건다. 여행을 혼자만 다녀봐서,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말을 걸기 위해서 일부러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한국은 갑자기 낯선 사람이 말 걸면 신천지, 다단계, 도를 아십니까일 경우가 많다는 걸 너무 잘 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나봤겠나. 친구가 되었다고 믿었는데 신천지였던 경우도 굉장히 많았다. 그렇게 낯선 사람을 좋아하는데 당연한 결과다. 한국 사람들 열에 7, 8명이 벽을 치는 건,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여기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임을 나도 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믿는다. 나의 사람이 영국 땅이 아니라 한국 땅에 있을 것임을 절실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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