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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Apr 26. 2019

쓰루노유 다이어리 - 11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



오늘부터 내가 떠나는 날까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백 퍼센트 적중했다. 지붕을 스타카토처럼 두드리는 빗소리에 새벽에 잠을 깨 부스스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목욕 수건을 챙겨들고, 우산을 쓰고 노천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새벽이어서인지 온천장은 물안개 속에 잠들어 있었고, 밤새 내린 비에 욕탕의 수온도 꽤 낮아져 있었지만 오랜 시간동안 물속에 머물기 딱 좋은 온도였다. 


머리와 어깨로 떨어지는 차가운 봄비의 냄새가 좋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젖을 걱정만 없다면 비를 맞는 일은 꽤 유쾌한 일이다. 어쩐지 그 무엇도 걱정할 것도 없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렇지도 않을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마치 욕탕을 나가는 순간, 신선 바둑 놀음 하듯 백 년이 순식간에 지나가 있을것만 같은 착각 마저 들었다. 


우리가 세심하게 옷을 골라 입고, 외모를 단장하는 등의 수많은 일들은 결국 거기에 맞는 행동으로 우리 스스로를 제약하게 한다.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니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알몸으로 자유롭게 비를 맞는 순간이, 우리의 몸 속 깊은 곳에 새겨져있는 태초의 무한한 자유로움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새하얀 백합이 코끝에서 뼛속까지 스며들 만큼 향기를 내뿜었다.

그때 아득히 먼 위에서 이슬방울이 똑 떨어졌고 꽃은 자신의 무게로 흔들흔들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차가운 이슬이 맺힌 하얀 꽃잎에 입을 맞추었다.

백합에서 얼굴을 떼면서 무심코 먼 하늘을 봤더니 단 하나의 새벽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

하고 그제야 깨달았다.     


-나쓰메 소세키 단편선, <긴 봄날의 소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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