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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디자이너 Feb 17. 2024

4_불행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나의 가장 큰 두려움과 마주하며

느낌이 좋지 않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토요일, 오후 5시 40분이었다. 강아지와 산책을 다녀와서 느긋하게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Missed Call'이 떠있었다. 한국시간으로는 일요일 아침 6시 40분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언니가 나에게 이 시간에 전화를 한 적은 미국에 온 17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걸다니,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역시나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말이 맞았다. 언니는 아빠가 밤 사이에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엄마가 새벽에 발견했지만 병원에 이송되었을 땐 이미 뇌의 사분의 일이 죽어있었고, 골든타임을 놓쳤기에 살아날 가능성조차도 희박하다고 했다.


언니는 내가 놀라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지만, 조용한 목소리 속의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언니와 형부도 이제야 연락받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다시 상황파악하고 연락 준다고 말했다. 멀고 먼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가족들이 병원에서 이곳저곳 연락을 취하며 아빠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기다리는일, 그뿐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니는 나에게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놀래지 말고 들어.. 오늘 밤이 제일 고비래.. 오늘 밤 잘 버티면 살아날 가능성은 25%, 그다음 2-3일은 50%, 그다음 일주일이 지나면 가능성이 조금씩 높아지는 거래.. 한 가지 확실한 건 기적이 일어나서 살아난다고 해도 인지능력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대. 그리고 이미 팔, 다리를 포함한 몸의 왼쪽 부분은 마비가 돼서 재활을 해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거래.."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정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빠의 소식을 듣고 그 후의 며칠이 정확히 어떻게 지나갔는지. 그냥 계속 휴대폰을 들고 안절부절못했던 내 모습, 눈물이 확 하고 터졌다가 또 차분해졌다, 그냥 그 모습을 반복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언니, 사는 게 원래 다 이런 거야?


의식이 없이 중환자실에 계신 아빠를 기다리며 언니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누구보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에너지가 많았던 아빠였다. 78세의 고령에도 아침마다 2시간 이상씩 운동을 하고 평생 해온 운동경력으로 그 나이에도 사람들 운동 가르쳐주던 모든 일에 의욕이 넘치는 사람. 문득 요즘 새로 그림 배우러 다닌다고 새로 산 가방과 색연필을 챙기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당장 비행기표를 알아보겠다는 나에게 언니가 차분하게 얘기했다.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안되고 혹시라도 장례식 치르게 되면 다시 와야 하니 일단 기다려보자고. 누군가 먼저 울면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 우리는 애써 담담하게 그동안 잘 살아온 아빠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또 우리가 살아갈 방향도 얘기했다.


삶이란 이렇게 허무한 거구나. 아빠가 생사를 다투던 그 시간에 나는 마음속으로 아빠를 응원하며, 한편으로는 이렇게 삶이란 어느 순간에도 끝날수 있음을 실감했다. 이런 생각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빠가 쓰러지기 몇 달 전 가장 친한 친구가 뇌의 작은 혈관이 터지면서 죽음의 문턱을 오갔던 일이 있었다. 담담하게 얘기하는 친구였지만 나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었다. 소중한 이들을 이렇게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는 것. 그들과의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 알면서도 우리는 자꾸 잊게 된다.


기적이 있기는 하네


우리의 피를 말리던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한순간은 마음속으로 '그래, 최악의 상황도 준비는 해야지.' 하다가 또 한순간에는 '아니야, 이렇게 그냥 허무하게 갈 리가 있겠어?' 머릿속을 채우는 수많은 생각과 먹먹한 가슴을 안고도 시간은 흘러갔다.


간절한 모두의 기도가 가닿았는지 아빠는 의식을 회복하셨고, 뇌부종도 많이 나아진 상태로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한국행 티켓을 사서 2주간 휴가를 내고 한국으로 날아갔다. 아빠도 그렇지만 그 큰집에 혼자 덜렁 남겨졌을 엄마를 생각하니 너무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은 위급상황이니, 우리의 관계 재정립 같은 문제는 모두 보류해야 했다. 일단 모두 무너지지 않게 서로를 꽉 잡고 그 자리에 있어 주는일 뿐.


코로나의 영향으로 보호자 가족들은 병실에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믿을만한 간병인을 구하는 것도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에 가고도 며칠을 기다리다 아빠가 진료를 받으러 나오는 잠시를 이용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살이 적어도 10킬로는 빠져 보이는 앙상한 몸과 얼굴. 항상 근육질에 어깨가 반듯하던 아빠는 휠체어에 제대로 앉을 수도 없어서 보조끈을 이용해 허리를 묶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불행이었다.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생의 불행을 선택할 능력 따위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이것뿐이다. 슬픔에 파묻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망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절망 속에서 희망의 한 자락을 잡고 조금씩 빛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우리 가족은 희망을 선택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려 노력했고,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음에 감사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빠의 2년 가까이되는 재활의 시간이 희망으로 가득한 따듯한 시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안에는 웃음보단 눈물의 시간이 더 많았다. 여러 어려움이 닥칠 땐 우리는 불행을 원망해보기도 하고, 서로에게 날 선 말을 뱉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간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백번 천 번을 들어도 자꾸 잊고 감사함을 잊는 우리지만, 나는 자꾸 기억하려 노력한다. 내 의지로 내 몸을 움직인다는 그 자체로 삶은 축복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설령 그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또 그 안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픔만 있고, 슬픔만 가득할 것 같은 재활병원에도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되찾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의 웃음이다.


불행을 막을 수 없다면

나에게도 저런 삶의 자세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모든 일에 기쁨과 슬픔의 양면이 존재한다면,

그 안에서 언제나 기쁨을 선택하는 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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