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지금은 아니잖아요
화해는 일단 미뤄둬
엄마와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당장 아빠의 일로 모든 게 중단되었다. 아빠를 재활병원에 모셔놓고 보니 엄마가 휘청 휘청거렸다. 하긴 젊은 나도 이렇게 힘든데 엄마는 오죽할까. 게다가 새벽에 침대밑에 떨어져서 마비가 온 아빠를 발견한 것도 엄마였으니, 아마 그 트라우마로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유난히 본인의 식사를 챙기지 않는 엄마에게 수년간 해온 잔소리지만 이번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제대로 영양가 있게 식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매주 새벽 배송도 신청해 줄 테니 알려준 대로 챙겨 먹을 것을 약속받고 또 받았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은 챙겨줄 수 있지만 이제 아빠의 재활은 장기전이 될 텐데, 엄마마저 쓰러질까 겁이 났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나의 예민한 성격 때문인지 나는 생리를 규칙적으로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 계속 생리를 안 하기에,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워낙 자주 한두 달씩 건너뛰기도 했으니 이번에도 언젠간 하겠지.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지내다 보니 이게 거의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국에 나온 김에 검사를 받고 원인은 알아야겠다 싶어서 산부인과에 가서 피검사도 받고 초음파 검사도 받았다.
'단순한 스트레스 때문이에요.' 이런 대답 정도를 들을 줄 알았던 순수했던 나의 바람은 그날 오후 바로 깨져버렸다. '여기 xx산부인과인데요. 아까 검사한 결과가 나왔는데, 담당 선생님께서 직접 말씀드려야겠다고 하셔서 연락드렸어요. 급한 일이니 오늘 오후에 병원 문 닫기 전에 꼭 방문해 주세요.' 아직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났다.
혹시 가족들이 걱정할까 '별일이야 있겠어?' 하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날 병원에서 재본 나의 혈압은 그날의 상태를 말해주었다. 평소 저혈압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숫자만 보던 난 그날 170이라는 숫자를 보았고 뒷목이 땅긴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몸소 체험했다. 정신없이 아빠와 면담 시간이 끝나고 산부인과가 닫기 전에 달려가보니 피검사 결과 호르몬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높다고 했다. 소견서를 써주며 바로 큰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아보라고 하셨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돌이켜보면 그때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이유는 아마 '나까지 아프면 안 되는데.' '지금은 내가 우리 가족에게 짐이 되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 때문인 듯하다. 당장 내일모레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떤 큰 병원을 찾아가야 하는지.. 막막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일단 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일단 마음이 약한 엄마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잘 모르니 신경외과나 내분비내과를 가보라고 했다. 아니, 이 두 곳 전혀 다른 곳 아닌가요? 둘 중에 여기 골라보세요, 하고 고르는 것도 아니고.. 의사 잘못도 아닌데 괜히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던 나는 괜한 죄 없는 의사 선생님 탓을 했다.
선의의 거짓말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MRI를 찍어본 결과 뇌하수체라는 곳 옆에 종양이 발견됐다. 다행히 악성 종양은 아니라서 암은 아니지만 시신경에서 가깝기도 하고 무시할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검사 전엔 호르몬 수치상으론 크기가 클 것 같지 않다던 선생님도 컴퓨터에 있는 자로 MRI속 종양의 크기를 재보고 움찔하셨다. 1센티미터가 넘는 크기이지만 바로 단기간에 커지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동공이 흔들리는 나를 안심시켰다.
생각보다 결과를 알고 나니 불안한 마음이 많이 사라졌다. 결과를 알기 전에는 나는 걸어 다니는 걱정인형을 빙의하며 각종 최악의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상상했다. 당장 병원에 입원해야 하고, 수술을 해야 하고, 병원비가 말도 안 되게 나올 것이며 이제 우리 집은 박살 날지도 모른다라는 그런 근거 없는 걱정들을.
엄마, 아빠가 사라진 보호자 자리에 앉은 언니는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혼자가 아니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평소 그렇게 가까운 사이의 자매가 아니었지만 이런 힘든 일을 생기면 갑자기 우리는 세상에 둘만 남은 전우들처럼 한 마음으로 뭉치곤 했다.
"일단 약을 한번 먹어보고 6개월 뒤에 다시 봅시다."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상담실을 나왔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걱정하고 있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엄마! 다 괜찮아. 그냥 머릿속에 작은 모래 알갱이 같은 게 하나 있어서 그랬대. 근데 약 먹으면 괜찮대."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거니까, 우리는 당분간 부모님께 알리지 않기로 했다.
다시 일상 속으로
6개월 뒤 다시 한국에 가야 하지만 일단은 일상으로 복귀해야 했다. 아직 시선처리가 잘 안돼서 내가 앞에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빠와 항상 그렇듯 눈물을 참지 못해 제대로 인사도 못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언니, 미안해! 너무 많은 짐을 남기고 가서.' 무겁고 복잡한 마음으로 수없이 오고 갔던 인천공항으로 들어가는 버스에서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기도했다. 우리 가족들, 모두 이 시간을 잘 견뎌주기를.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회사일과 일주일에 한 번 나가는 강의까지 미뤄뒀던 일처리에 정신이 없었다. 거기에다가 아빠 일이 터지기 직전 나는 이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보스턴에 있는 회사와 연결이 잘돼서 한국에서 돌아온 이틀뒤 나는 보스턴으로 날아가 인터뷰를 보았다. 마음이 어떤지 돌아볼 새도 없이 정신없이 흘러가는 상황 속에 나는 뉴욕의 집을 처리하고 새로운 회사를 위해 보스턴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