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글이지만, 그대로 올려봅니다.
올 겨울 들어 체감 온도 최저. 왜 나는 이데아고라에 가는가. 속사정을 뒤로하고 어둔 대기 속의 밤공기는 차고 맑고 시원하다.
저녁 독서 모임은 낮모임과는 또 어떻게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는지, 곧 떠날 도쿄 여행을 위해 한때 도쿄 시민이었던 분에게 몇 가지 팁을 얻고자 귀가하는 시각의 문으로 나는 출가(?)를 하였던 것이다.
참, 손에는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들고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소설 속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남자는 참으로 섬세하다. 과연 남자라는 동물이 이럴 수 있을까 싶도록 섬세하고 예민하게, 관찰해 온 사랑의 과정들을 객관화시켜가고 있다.
마르크스라는 미국의 희극인은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했으며(마르크스주의), 천진한 열다섯의 여자 아이는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남자는 나를 계속 기다리게 하는 남자야.'
약속한 9시 정각에 나타나는 남자와는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9시 30분에 나타나는 남자를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고 했다.
주인공 남자는 운명의 당사자이자 절대 사랑의 꽃으로 이상화된 그녀, 클로이가 자신을 열렬히 사랑해 주기를 바랐으면서도 막상 그녀의 사랑을 거머쥔 순간 터무니없는 화를 내게 된다. 이것을 객관화시킨 것이 '마르크스주의'. 대다수 인간심리에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을 만큼 마르크스주의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알랭 드 보통의 섬세함은 마르크스주의의 단계를 느끼고 알아채고 성찰하면서 그다음의 단계로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과정을 이어가는 데에 빛을 발한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이 단계의 감정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성찰하지 않는다. 이즈음 관계는 끝맺음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사랑의 기쁨은 사랑하는 당사자 자신의 몫이다. 클로이의 사랑스러움은 주인공 남자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귀가 후, TV 화면에는 지원이가 열렬히 챙겨보는 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 영상이 흐르고 D학점을 받아 어깨가 늘어진 홍설 뒤로 유정이 따른다.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홍설보다 유정의 마음에서 설렘과 기쁨이 느껴진다.
더불어 이데아고라의 대표께서는 클래식 음악 듣기로 포레의 시칠리아노를 준비하였으며, 김춘수 시인의 '촛불'이라는 시와 어느 철학자의 에세이 한편을 준비해 왔다. 그러고 보면 이데아고라를 열렬히 이끄는 사랑의 이 기쁨은 전 대표의 몫인 듯.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다. 잘 들여다보면...
나는 왜 하루의 피로와 찬겨울밤을 헤쳐 이데아고라로 향했는가. 이유는 알싸한 겨울공기를 마시며 좀 걷고 싶었기 때문. 겨울밤을 이데아고라에 간다는 명분을 얻어 좀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나는너를사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