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참나무가 잎을 내고 있어요

by 수경

대왕참나무야


목련이 톡톡 지고 벚꽃이 프사사 흩날리더니

이젠 영산홍이 살짝이 꽃피우기 시작한다.

나무들은 어느새 연두빛으로 때깔나게 차려입는데

이 와중에 아직도 잠이 덜 깬 길 잃은 동무가 있다.

우리 아파트 울 안에 있는

손이 조막만한 대왕참나무.

때가 어느땐데 아직도 바삭 메마른 누른 잎사귀를 달고 있느냐

어서 일어나 봄꿈을 가꾸려무나

세수도 하고 단장도 하고 새옷도 갈아입으렴.

얼마나 게으른지

마른잎 떨구기를 미룰 때까지

끝까지 미루더니

하룻밤 사이에 겨울잎 밀어낸 자리에

아기 헛바닥같은 연두 새잎을 달고 있다니.

매일 아침마다 한 그루씩

뻥튀기 하듯 봄나무가 되고 있는 대왕참나무야

도깨비같고 요술쟁이같고

눈 비비며 일어나는 게으름 대장아



돛단배에 몸을 실은 새봄이 3월에서 4월로 가파르게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4월 21일. 곧 5월이 신록의 문을 열면서 만물의 색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계절이 옵니다. 이제는 웬만한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잎사귀도 제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게으름대장 대왕참나무도 이제 지난 가을의 낙엽을 벗고 새잎을 한두 잎 피우며 갈아입고 있네요. 오늘은 대왕참나무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대왕참나무가 제 눈에 확 들어온 건 아파트 화단에서 수분이 빠져 건조한 누른 빛의 단풍을 겨울 내내 달고 새봄이 되어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무들은 새봄을 맞이하는 기대에 꽃 피우고 잎 내느라 분주하고 설레는 모양을 어떻게라도 드러내는데 비해 대왕참나무는 쿨쿨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모양이 제게는 한없이 미루기 좋아하는 게으름대장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아직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대왕참나무들이 있긴 하지만 대왕참나무가 요며칠 새에 눈을 비비고 깨어나고 있습니다. 새록새록 잎을 내고 있습니다.


대왕참나무는 우리나라 참나무 육형제로 대표되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와는 달리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도심의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습니다. 참나무이니 당연히 도토리 열매를 달고 있고 잎의 가장자리가 깊이 패어 있는 결각이 두드러져서 잎사귀가 한자 왕(王)자를 꼭 빼닮았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는 우승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자국의 독일참나무 묘목을 우승 기념으로 가지고 오게 됩니다. 독일에서도 당연히 독일참나무 묘목이라고 생각하고 수여한 나무가 우리나라에 와서 자라면서 북아메리카 원산의 대왕참나무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곳곳에 아이러니는 숨어있습니다.


이 묘목은 손기정 선수의 모교였던 양정중학교와 양정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심어졌는데, 양정고등학교가 1987년 서울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면서 양정 중, 고등학교가 있던 원래의 자리에 손기정체육공원이 조성되면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 나무는 수령이 약 90년이고 높이가 약 28미터에 달하는 거목으로 성장하여 손기정 선수의 역사적 업적을 대대손손 기리는 상징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손기정체육공원이 있는 서울 중구의 만리동뿐만 아니라 서울역 일대 서울로 1017 등지에 대왕참나무가 가로수로 식재된 것은 손기정체육공원의 기념수와 같은 수종을 선택함으로써 손기정 선수의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대왕참나무가 이제 기지개를 켜면서 새로운 날의 새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서울 손기정체육공원의 손기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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