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서를 내고 건물 바깥으로 나올 무렵에 줄기 전체에 불붙은 것처럼 타오르는 홍자색 박태기나무를 보았습니다. 지구 기온이 오르는 기후 위기가 심각해서일까요. 아무리 그래도 3월 초, 중순에 온몸에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만개한 박태기나무를 보는 일은 반가움과 걱정이 교차하는 일이었습니다. 학교지킴이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 이 나무는 언제쯤 이렇게 꽃이 피었던 걸까요?"
"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요!"
머리를 긁적이며 괜스레 미안해 하시는 학교지킴이 선생님은 어쩐 일로 학교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으셨고 저는 지원서를 내고 가는 길이라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쪼록 합격하셔서 학교에 나오시면 좋겠네요!" 하였습니다.
3월 중순에 박태기꽃이 만개했던 2년 전에 저는 일자리가 절실하게 필요하였고 많은 지원서를 곱게 작성해 비행기를 날리듯 띄워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때의 절실함은 인생2모작에서 주인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박태기나무가 열렬하게 피었던 그 학교 대신 저는 다른 한 곳의 학교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홍자색의 짙은 꽃색이 봄의 생동감을 더해주는 때문인지 대다수의 학교에는 몇 그루의 박태기나무가 있습니다. 근무하는 지금의 학교에도 박태기나무가 있습니다. 올해는 2년 전과 달리 박태기나무가 4월에 피었습니다. 지난해 결실을 맺은 콩꼬투리 열매를 주렁주렁 그대로 매단 채 꽃이 피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교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교장실이 있고 이른 시간임에도 항상 불이 켜져 있습니다. 저의 출근 시간은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30분이 빠른데도 교장실은 늘 반짝반짝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과거 젊었을 때와 달리 집 가깝고 가기 편한 곳이 좋습니다. 15분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면서 만약 30~40분 차로 가는 거리라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른 시간에 가장 먼저 불을 밝히는 이의 마음과 먼 거리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고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4월 초에는 초등학교 1학년들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기 위해 학교의 여러 공간들을 방문합니다. 아플 때 찾는 보건실에 이어 교무실과 교장실도 방문하였습니다.
"교장실은 왜 이렇게 의자들이 많아요? 왜 의자들이 둥글게 있어요?"
"여러분들이 학교 생활을 즐겁고 건강하고 유익하게 할 수 있도록 여러 선생님들과 많은 회의를 이곳에서 하느라 의자들이 둥글게 모여있어요."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은 교무실과 교장실에서 하는 일이 학교와 학생들의 안전과 건강하고 행복한 학교생활을 위한 일이라고 친절하게 안내하였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희한하게 박태기나무가 겹쳐 생각이 났습니다.
박태기나무의 꽃은 잘 지어진 밥알이 모여있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밥풀떼기, 밥티기 등으로 불리다가 박태기나무가 정식 이름이 되었습니다. 배 고플 때의 한 공기 밥처럼 든든한 이름입니다. 박태기나무는 꽃부터 피우는 많은 여느 나무들처럼 꽃이 화려하게 피고 난 뒤에 잎을 내면서 그 꽃 진 자리에 콩꼬투리 열매를 다는 콩과 식물에 속합니다.
콩과 식물은 알고 보면 여러모로 유익한 식물입니다. 식물들은 토양이 비옥해야 잘 자랄 수 있는데, 조금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면서 자신이 서 있는 땅을 기름지게 하여 다른 식물들도 함께 잘 자랄 수 있도록 돕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식물이 바로 콩과 식물입니다. 대기 중에는 질소와 산소의 비율이 각각 78%와 22%이고 식물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질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대기 중에 78%나 되는 질소가 있다고 해도 식물들은 이것을 바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질소가 암모니아로 바뀌는 '질소고정'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식물들은 뿌리를 통해 질소를 흡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콩과식물들은 질소를 암모니아로 변모시키기 위해 뿌리혹박테리아라는 박테리아와 협력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흙 속에는 박테리아가 살고 있습니다. 콩과식물이 어딘가에 있을 박테리아를 위해 자신을 알리는 플라보노이드라는 물질을 분비하면 박테리아 또한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신호 물질로 화답합니다. 이 신호 물질을 감지한 콩과식물은 뿌리혹박테리아가 집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뿌리에 혹을 만들어줍니다. 뿌리혹박테리아는 공기 중의 질소를 암모니아로 만들어 토양을 비옥하게 하여 콩과식물이 잘 자라도록 돕고 콩과식물은 뿌리혹박테리아에게 광합성으로 만든 양분을 나누어줍니다. 바로 공생입니다. 이러한 뿌리혹박테리아와 콩과식물의 공생관계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식물들에게도 유익합니다.
공동체가 건강하게 운영되는 데는 보이지 않는 헌신과 열정과 책임이 토양 아래의 자양분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태기나무를 보면서 2년 전 제 속에 있던 절실함을 되새겨보고 학교 곳곳을 단단하게 다지는 선생님들의 열정을 보게 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콩과식물과 뿌리혹박테리아의 공생관계와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까닭으로 오늘은 박태기나무를 비롯한 콩과식물의 삶을 들여다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