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단풍나무

by 수경

식물학에 유형기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나무가 씨앗에서 발아해 뿌리와 줄기, 가지를 빠르게 키우지만 꽃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아직은 미성숙한 시기를 말합니다. 역으로 이 시기는 꽃과 열매를 맺는 성목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키를 키우던 외적 성장이 잠시 멈추고 더 치열한 내적인 성숙이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는 에너지를 저장하고, 분화된 꽃눈을 형성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준비를 하게 됩니다.


나무마다 유형기를 보내는 시간은 다릅니다. 산 위에 푸르른 기상을 드러내는 소나무는 5년 정도로 유형기가 생각보다 짧습니다. 참나무 종류는 10~20년, 은행나무는 15~20년, 너도밤나무는 무려 30~40년 간의 유형기를 거칩니다. 그리고 단풍나무는 15년 정도의 유형기를 거쳐 꽃과 열매를 피운다고 합니다.


100년이 훨씬 넘는, 나무가 살아가는 긴 시간에 비하면 이러한 유형기가 길다 할 수 없지만 사람의 생에 기대어 생각해 보면 짧은 시간이 아닌 듯 느껴집니다. 주변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단풍나무는 한결같이 단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비교적 키가 크지 않은 단풍나무에 양쪽에 날개를 단 열매를 보면 한동안 그 자리에 멈칫하게 됩니다. 15년이라는 시간을 거치고 이 단풍나무는 어른 나무가 되었구나, 힘든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 이제는 꽃과 열매를 피워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는 시기로 살아가야 하는구나, 작은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으로 짠한 감정이 듭니다.



얼마 전, 대구수목원 입구에서 느티나무 길을 거쳐 왼편으로 나있는 데크 길을 걸으며 단풍나무의 색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데크 길에는 주로 왕벚나무와 모감주나무 그리고 계수나무와 단풍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피목(줄기에 난 가로줄 무늬, 이곳을 통해서도 왕벚나무는 숨을 쉰다)이 두드러지게 형성된 왕벚나무는 굵은 줄기와 가지를 힘있게 하늘로 뻗었고 모감주나무는 바닥에 흩어진 꽃과 떨어진 열매로 천상 가까이 닿아가려는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올곧은 계수나무 역시 한치의 굴곡 없이 위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키 큰 나무들 사이에서 단풍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단풍나무는 평소의 단정하고 단아한 모습과 달리 까치발로 한 뼘 키를 세운 뒤 엿가락 늘이듯 몸을 늘이고 목을 길게 빼듯 줄기를 늘려 자신의 키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마치 주변의 키 큰 나무들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듯 나뭇잎들에 가려진 아래 줄기에는 잔 가지를 쳐낸 단순한 수형으로 매끄러운 줄기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키를 높이는 일에 매진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단풍나무는 왕벚나무와 모감주나무와 계수나무의 키를 능가하는 일은 없습니다. 키를 높여 햇빛 가까이 가되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보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키를 높인 다른 나무들이 뻗은 가지 그 아래에 자신의 위치를 정해 뻗는 힘과 응축하는, 팽팽한 두 가지 힘의 균형을 제대로 조율하고 있었습니다.



단풍나무는 그늘을 좋아하는 나무입니다. 다른 나무의 잎을 통해 내려오는 빛을 선호하여 그 아래에서 잘 자라는 음수 나무입니다. 하지만 단풍나무가 음수 나무라 해도 빛을 향해 키를 세우려 열심히 달리고 있는 다른 나무들의 대열에서 손 놓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하고 단아한 모습만을 고수하게 되면 나뭇잎 사이에서 떨어지는 순한 햇빛이 아니라 컴컴한 어둠의 그늘에서 헤쳐나올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단풍나무는 주변 키 큰 나무들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이러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만 같습니다.



단풍나무과의 단풍나무속에는 약 200여 종의 단풍나무가 있습니다. 단풍나무는 주로 북반구의 온대지방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 관상적 가치가 높은 나무로는 단풍나무와 당단풍나무, 복자기나무, 복장나무, 고로쇠나무, 신나무, 산겨릅나무, 시닥나무가 있습니다. 낮고 깊은 가을 산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대표적인 단풍나무들입니다. 그리고 외래 수종으로는 중국단풍과 네군도단풍, 설탕단풍 등이 있습니다. 높고 크게 자라는 중국단풍은 도시의 가로수로 널리 심어져 우리와 가까이 이웃하고 있습니다.



공원이나 집 가까이에 있는 단풍나무와 높은 산에서 자라는 북방 수종의 당단풍나무, 그리고 북한의 추운 곳에서 자라는 복장나무, 특히 붉은 단풍이 일품인 세 잎의 복자기나무는 산에서 물과 어우러져 빼어난 경치를 만들고 있습니다. 단풍나무는 관상적 아름다움 때문에 조경 수종으로 가꿔지고, 원예가들이 재배하면서 수많은 품종과 변종이 만들어져 나무의 수형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도시의 조경 수종들이 특별히 단아하고 아담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에는 이런 품종 개량의 영향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차례 다시 단풍나무를 찾아 바라보기를 해 봅니다. 단풍나무가 단정하고 단아하다는 생각은 제대로 살피지 않은 저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느티나무나 플라타너스, 왕벚나무만큼 크고 높이 자라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같은 장소에서 성목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단풍나무는 평상 하나를 품을 수 있을 만큼 오가는 사람들에게 쉬는 자리를 내 주는 수관으로 그늘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줄기에도 내공이 담겨있고 은은한 기품이 배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단풍나무들을 단풍나무가 되도록 하는 단풍나무의 정체성은 '시과'라는 열매에 있습니다. 시과는 날개 열매라는 뜻입니다. 2개의 씨앗이 마주 붙은 날개에 달린 열매는 날개가 만드는 좁거나 넓은 각도, 혹은 포개진 정도에 따라 단풍나무 식별의 근거가 됩니다. 단풍나무의 열매는 익으면 씨앗을 품은 두 개의 날개가 분리가 되면서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가 새로운 삶의 공간을 모색하는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9월의 무더위 속에도, 나무 잎사귀들은 한 잎 두 잎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는 준비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잎들 중에는 타는 노을빛에 자신의 몸을 물들이는 잎이 있고, 열매와 씨앗도 속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단풍나무는 단아한 자태로 성목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의연한 기풍을 빛내며 서 있습니다. 씨앗을 바람에 떠나보낼 때에도 그 의연함은 흐트러짐이 없겠죠!



"날아라, 단풍나무여!"

곧 가을을 맞이하게 될 단풍나무에게 저는 이렇게 응원을 보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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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의 잔 가지를 쳐내고 키를 세우는 일에 매진하는 단풍나무
정독도서관의 단풍나무. 그 아래 평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쉬어간다~
가로수 중국단풍이 만드는 싱그러움

날아라~ 단풍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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