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의 '병원'이라는 시에는 가슴을 앓고 있는 젊은 여자가 나옵니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나비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이 여인에게 '나'는 마음으로 그녀의 건강과 내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 바람은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가만히 누워보는 일로 대신합니다.
간혹 누군가를 사랑하고 응원하고 위로하는 일이 어느 만큼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무력감을 안은 채, 누군가 위안과 치유의 자리로 삼고 다녀간 길을 나도 걸어봄으로써 그대들과 나의 건강과 안녕을 빌어보기도 합니다.
팔랑 바람을 타고 황금빛의 은행잎들이 내려와 바닥에 모여있습니다. 올려다본 은행나무는 여전히 푸르릅니다. 이 노오란 은행잎은 푸르른 나뭇잎들 사이 어디쯤에 머무르다가 이렇게 고운 자태로 하강을 결심하였을까요?
떨어진 은행잎 하나를 주워듭니다. 세로줄 무늬가 선명하게, 중간이 갈라진 부채꼴 모양의 은행잎은 닮은 꼴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나무에 '은행나무'라는 이름을 어렵지 않게 불러줍니다.
닮은 꼴이 없다는 말은 형제, 자매, 부모와 사촌 등 친족이 없이 오로지 자신만이 유구한 시간 동안 홀로 존재해 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이미 거의 완성형의 나무이자, 변화가 필요하지 않거나 혹은 거의 변화를 거부하는, 고독과 외로움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2억 7천만 년 전 중생대에 가장 번성한 것으로 알려진 은행나무는 백악기를 거치며, 백악기 이후에는 현재의 은행나무 잎과 거의 유사한 형태에 도달하였습니다. 1억 년 전 화석에서 발견된 그 당시의 모습이나 생리적 구조가 지금의 모습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현재 살아있는 나무가 화석에서의 모습과 거의 유사할 때, 우리는 이 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으로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은행나무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생물의 발생 계통은 역, 계, 문, 강, 목, 과, 속, 종의 계보로 체계화할 수 있는데, 여러 생물 '종'이 모여 '속'이라는 공통된 속성을 나타내면 이 '속'의 무리에서 모은 공통된 속성이 다시 '과'의 단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계'와 '역' 단계로 갈수록 훨씬 포괄적이며 공통된 조상을 만나게 되는 단계가 됩니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문, 은행나무강, 은행나무목, 은행나무과, 은행나무속에 속한 유일한 종으로서의 은행나무 한 개 종만이 지구상에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1억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은행나무는 빙하기와 높은 온도로 펄펄 끓는, 극단적인 변화를 모두 극복하였습니다. 화석으로는 당시에 12개 종의 은행나무 종이 있었다고 하지만 오늘날의 은행나무(Ginkgo biloba L.)만 유일하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공해와 극심한 추위와 더위와 가뭄 같은 극단적인 기후와 닭발 같은 강전정에도 강인하게 버티는 나무가 은행나무라 해도, 변화가 굳이 필요 없는 생태적 강인함을 가졌다고 해도 1억 년의 세월 동안 은행나무는 스스로 분화하고 진화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문'의 단계에서부터 유일한, 고독하고 변화를 거부하며, 완고하고 고집 센 노인 같은 은행나무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인간에 의해서 존재할 수 있는 은행나무가 우리들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무리 지어 군락을 이루며 살아가는 힘이 있을 때, 우리는 '자생'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은행나무는 오랜동안 자연에서 자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오랜 탐험에도 야생지를 찾는데 실패하고 근래에 중국의 양쯔강 하류 해발 약 2000m 지점의 천목 산맥에서 야생지를 발견하여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가까이 사는 도시와 근교의 은행나무는 오로지 사람에 의해서 사람이 심고 가꾸면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주에서 뚝 떨어져 낯선 땅에 터를 정해 살아가는 은행나무에게, 오는 가을에는 슬며시 다가가 좀 더 오래도록 그 곁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그의 고독과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누군가의 안위와 치유를 위해 보듬었던 그 자리에 오래 서서 노래 한 곡조를 읊조리고 올 생각입니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 꿈을 보았네.
가지에 사랑의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은행나무~~
이렇게 노래 한 곡조를 부르고 올 생각입니다. 피리 연주 한 곡이나 하모니카 한 곡도 좋고, 케데헌의 골든을 흥얼거려도 완고하고 고집 센 은행나무 할아버지가 흐뭇해할 것만 같습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작은 재롱잔치를 벌이면 좋을 듯합니다.
※ 은행나무가 1억 년 전 진화의 완성에 도달했다는 표현은 문학적 표현이 가미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살아있는 화석'이라 해도 조금의 진화는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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