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 입성
수술 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옆에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계산하에 2인 실로 예약을 했다. 다인 실은 코로나도 걱정이었고, 죽을 수도 있는 마당에 뭐든 나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자고 다짐했었다.
‘사치라곤 안 해보고 산 지난 40년인데, 살면서 내가 병실에 누울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나…’
1인실은 보험도 안 되고, 도움 받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 2인실로 선택했다. 건강할 때는 혼자 쉬는 시간이 소중했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을 즐겼지만, 환자가 되고 나니 혼자라는 생각만큼 두려운 것이 없었다.
입원 서류를 작성할 때에도 보호자가 없으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세상이 바뀌다 보니 보호자 없이 환자 스스로가 수술에 필요한 모든 서류에 직접 사인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긴 1인 가족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이혼한 것을 잊고 지내다가도 늘 법적 서류 앞에서는 보호자가 없다는 사실에 불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애 낳던 날도 옆에 없었던 사람인데, 유방암 수술한다고 곁에 있어주었을까?’
전 남편을 생각하면 명치부터 무언가 답답한 기운이 올라왔다. 슬픈 감정도 늘 함께 따라왔다. 이혼한 지 4년이 지났고 별거의 시간까지 합치면 8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결혼 생활을 떠올리면 늘 불행해졌다.
믿음과 존중이 없던 결혼생활을 일찍 마무리 짓지 않고 지속해 오며 받은 스트레스, 이혼 후 밀려들었던 온갖 자괴감과 불안한 감정들을 잘 해소하지 못해서 끌어안고 산 것이 암을 유발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자명했다.
아이가 걱정이 되어 이혼을 결심하지 못하고 홀로 고민했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마음은 늘 갈대밭처럼 휘청거리고, 메말라있었다. 나만 똑바로 서면 아이도 나도 모두 괜찮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에야 모든 번뇌를 놓아버릴 수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나도, 아이도 성장할 시간이 필요했다.
싱글 맘이 아이를 키우며 사회에서 우뚝 서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외적 성장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튼튼하게 엄마와 아이가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했더라면 마음 편하게 이제 세 살 된 아이 양육만 하면서 지낼 수도 있었겠지만, 다시 사회로 복귀할 준비가 필요했기에 공부와 일을 병행해서 했다.
그 와중에도 아이가 하원하고 집에 와서 잠자기 전까지는 꼭 함께 있어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의 부재로 느꼈던 외로움을 아이에게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없는 허전함과 외로움을 최대한 채워주려고 노력했다. 아이도 아빠의 존재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환경으로 이사 온 이후부터는 본능적으로 나에게 집착했다. 그래서 더 아이가 딱하고 마음이 아팠다.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어른들이 이렇게 까지 하나, 처자식 버리고 떠난 전 남편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려야 하나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민했다. 나는 그 사람이랑 도저히 남은 생을 함께 살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아이 때문에 쉽사리 이혼을 할 수가 없었다. 아빠 없이 살아갈 아이가 걱정돼서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애를 혼자서 키울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어른들의 무책임함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무조건 아이였다. 전 남편에게 나와는 헤어져도 아이는 보고 살아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설득했지만 새 가정에 충실하고 싶었던 건지 전 남편은 아이를 만나는 것도 회피했다. 그렇게 4년이란 세월을 별거하며 지냈고, 그 긴 시간 동안 내 속은 타 들어갔다.
그때 내가 좀 더 현명해서 내 마음만 잘 챙겼더라면 이렇게 병이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아이를 보며 아팠고, 내 처지가 처량했고, 전 남편에게 분노했으며 앞으로 펼쳐질 인생이 두려워서 수년간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걱정과 불안 때문에 상담 의사를 찾아가 보고도 싶었지만, 신경 안정제 처방밖에 더 해주겠냐는 생각에 혼 술이나 산책으로 억눌린 감정을 풀곤 했다. 거의 이 삼일에 한 번은 와인이나 위스키를 한두 잔씩 마시고 잠을 청했으니 암세포가 얼씨구나 하고 가슴 한편에 뿌리를 내렸을 법도 하다.
그래도 힘든 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 바닷가로 내려가는 저녁 산책 길은 석양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픈 마음도 매일 그림처럼 변하는 하늘 색깔을 보면서 치료가 되었다.
‘저녁 하늘빛도 매일매일이 새로운데 인생이 늘 똑같기만 하겠어? 좋은 날도 오겠지…’
그렇게 아이는 네 살이 되었고, 유치원에 다녔고,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던 해에는 나도 강의업체의 대표가 되어 있었고, 겸임 교수 자리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나도 성장하고 나니 전 남편과 이혼할 자신이 생겼다.
나에게 이혼을 청구할 수 없던 그의 처지를 감안해 내가 합의로 잘 정리하자고 권했다. 지난 4년 간 단 한 번도 아이를 보러 제주에 오지 않던 전 남편이 이혼해 주겠다고 하니 초 스피드로 제주에 내려왔다. 조정기간이라는 것이 있어 두 번을 내려왔어야 하는데 두 번다 일찌감치 법원에 와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사는 내내 나와의 시간 약속에선 단 한 번도 시간에 맞추어 나온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내려온 김에 아이 한 번 보고 가. 나중에 후회해.”
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비행기 시간을 핑계로 아이도 보지 않고 서울로 돌아가 버린 게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도장을 찍고 나오면서 4년 전에 이혼을 했어야 하는데, 괜히 아이를 핑계로 너무 오랜 기간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이에 대한 일말의 미련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저런 사람 때문에 그 긴 시간을 고민한 것을 생각하니 허탈하기만 했다.
누군가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라고 하길래 현자의 명언이라며 감탄을 했다. 나는 역으로 ‘결혼은 신속하게 이혼은 신중하게’ 하다가 4년이라는 긴 시간을 별거라는 암흑 속에서 살았다. 차라리 이혼을 일찍 했더라면 마음의 정리가 빨리 돼서 몇 날 며칠을 고민으로 뒤척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혹시 이혼을 신속하게 했더라면 암이 생기지 않았을까?’
수술을 앞두니 별의별 생각들이 다 떠오르고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16층에 있던 2인실 병실은 아늑했고, 창 밖으로 서울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창가 자리는 다른 환자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내가 누울 침대도 편안해 보였다. 주치의는 수술 전 사인을 받기 위해 수술 전 날 직접 병실로 찾아왔다.
“삼중음성 환자가 최근 급격히 늘어서 연구가 진행 중인데, 수술할 때 조직을 조금 더 떼내서 제가 연구에 사용해도 될까요?”
어머니 친구분께 소개받은 주치의는 그야말로 명의였다. 불필요한 말은 일절 하지 않았고, 늘 평정심을 잃지 않는 동시에 예리한 눈매로 환자에게 집중하는 기술마저 갖춘 주치의에게 나는 무한 신뢰를 느꼈다. 처음 진료실로 들어가자마자 다짜고짜
“선생님, 저 좀 살려주세요.”
라고 했을 때에도 무슨 큰 일도 아닌데 당장 죽을 사람처럼 호들갑이냐는 눈빛으로 나의 두려움을 잠재웠다. 주치의는 항암 치료 중에도 치료 결과가 좋으면 함께 기뻐해주었고, 무언가 안 좋으면 같이 아쉬워하는 게 온전히 느껴졌다. 내 몸을 맡길 의산데 그 깟 조직 몇 조각 못 떼 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삼중음성 환자들을 위해 연구가 진행된다니 당연히 좋은 마음으로 협조해야 했다. 안 그래도 예후가 안 좋은 삼중음성이 최근 젊은 암 환자들 사이에서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딱히 치료 약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얼마든지 떼서 연구에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인류의 암 정복에 있어서 하나의 표본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 깟 살 점 몇 조각 떼어주지 못할 일이 없었다. 교수가 연구를 훌륭히 해 내어 삼중음성의 치료약이 개발될 수도 있는 일이니 좋은 마음으로 협조에 임했다.
월요일 오전 11시. 의사가 수술을 집도하기에 집중력도 좋은 시간에 수술이 배정되었다. 수술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대기실에 누워있는데 마치 고장 난 자동차를 고치는 공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 수술실로 들어가면 그다음 대기, 그다음 또 대기.
나도 대기실에 수술 모자를 쓰고 누워있는데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호흡이 완전히 끊겼다가 돌아오는 전신마취 수술이라 떨리긴 했다. 긴장이 돼서 두 손 모아 기도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다가오더니,
“수술 잘 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다.
‘수술실에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하고 올려다보니 주치의가 내려다보면서 떨고 있는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다른 대기 환자들은 주치의가 대기실로 찾아오는 걸 보지 못했는데, 나는 좀 놀라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밖에선 친구가 보호자로 대기해주고 있었고, 수술 집도의는 대기실까지 와서 본인만 믿으라는 확신을 주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최선을 다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암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대기실에서 수술실로 이동했다. 마취실로 들어가니 의사들과 인턴들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에워싸더니 산소 호흡기를 연결했다. 그리고 무슨 질문들을 했던 것 같은데 무어라 대답을 하다 말고 순식간에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