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이민와서 첫 아픔
1967년, 내가 캐나다로 이민을 오던 그해 겨울은 난생 처음 맞는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2월 초의 추위는 내 마음까지 얼게 했다. 쇼핑 센터마다 쌓아 놓은 눈은 내 생애 처음 만나는 거대한 눈 산들이었다. 나는 여행 가방 하나가 내 삶에 전부인듯 영하 30 도가 오르내리는 추위에 오타와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시외버스 정유장을 찾았다.
오타와는 캐나다 수도이며 불어와 영어를 사용해야만 편하게 살수 있는 도시이다. 이곳은 내가 두번째로 일을 시작한 병원인데 6 개월 만에 사표를 낸 곳이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시고 병원사목을 맡고 계신 한국 신부님께 내가 떠나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고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고 하자 엄청 꾸짖음을 주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속에 머문다. 이유는 매일같이 내가 격어야 하는 언어로 오는 이 스트레스는 그 선택만이 나를 해방시켜 줄 것 같았다.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하고 오랜 세월동안 준비한 영어는 그런 데로 자신을 갖고 왔는데 첫날 직장에서 부딪친 나의 언어 구사에서 예( Yes)와 아니오( No)의 구별까지 할 수 없을 정도로 얼어 버렸으니 …
내 머리는 텅 빈 항아리 처 럼 되어 갔고 그 스트레스를 받는 육체는 하루하루 힘겨운 직무에 임했다. 내가 가지고 온 자존심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매일 경험 해야 하는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고동 소리가 내 가슴을 망치질로 두들겨 대는 듯한 순간들, 남몰래 양 손에 고이는 식은 땀은 나 자신만이 느끼는 공포의 세계였다.
더 이상 나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빨리 떠나는 것이 이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길이라고 수없이 혼잣말로 중 얼 대곤 했다. 오직 내게 편한 사람들은 어린아이 환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인환자와 달라 나의 제한된 언어로써 대화가 조금은 가능했고 그런대로 나를 편하게 해 주었다.
그곳에서 친구들도 몇 사람 사귈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적 여유로움이 허락되지 않았다. 매일 힘든 근무가 끝나면 밤에는 버스를 타고 먼 거리에 있는 이민자들이 배우는 영어 학교에 가서 다시 시작한 공부, 남들은 새 이민자라는 명목아래 생활 보조금까지 받으면서 이나라 말을 공부하는데 나는 내 자존심이 그것 마져도 허락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곳을 떠나 한국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손짓, 발짓을 하드라도 영어공부를 해야 했기에 찾은 곳이 온타리오 주 북쪽 끝에 위치한 매라손(Marathon) 이란 작은 시골 병원이었다. 인구가 약 500 가구가 되는 목재로 유명한 시골 마을이었다. 이곳은 우연히 간호잡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나를 대 환영하며 오라는 희망을 안겨준 곳이었다. 새로운 나라에 온 나는 어디를 가든 별 다를 게 없는 처지였으니 기쁘게 승 락 하고 이곳이 어디에 위치한 곳인지, 여행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두려움 없이 떠났다. 지금 같아 서면 인터넷으로 많은 것을 알고 떠날 수가 있었겠지 만 …친구들과 송별인사를 나눈 후 완행 기차표를 사서 거의 2 틀 동안 여행을 해야 하는 온타리오 주 끝에 위치한 정부가 원주민 인디언들을 위해서 마련해 준 작은 예약 거주지였다. 장시간 여행하는 동안 처음 내가 만난 두 백인 청년들은 혼자 여행하는 20대 초반의 젊은 동양 여인을 희롱하기위해 무섭게 나에게 접근해 왔다. 문화와 언어가 생소한 나에게는 이 순간을 모면할 아무런 방어책이 없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다. 이순간이 빨리 지나가기 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이 경험은 새로운 문화에 부딪친 내 삶의 첫 시련이었다.
다행히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차는 끝없이 이어지는 5 대호의 하나인 슈페리오 호수를 끼고 이어진 앞과 뒤를 볼 수 없는 휘어진 기차길을 쉬지 않고 연기를 뿜으면서 달려갔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검푸른 슈피리어 호수와 끝없이 펼쳐진 하이웨이, 이 기나긴 여행을 어떻게 무슨 용기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런데 이 미지의 선택이 먼 훗날 내가 이곳에서 살아갈 힘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기에 나는 이 낯설고 외로운 길을 감행 했었다. 이곳 병원은 내가 마음데로 활동할 수 있는 일터였다. 부족한 언어로 일터에 나갔지만 그것이 내가 하는 일에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주 환자들은 인디안 원주민들이었고 이곳에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백인들이었다. 출산을 하기위해서 오는 산모들, 칼부림으로 상처입고 밤늦게 응급실로 실려오는 원주민 환자들, 천식으로 들어오는 어린아이 환자들, 성인병으로 앓는 다양한 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닥치는 데로 돌보면서 쏟은 나의 열정은 언어에서 오는 그런 스트레스는 느낄 시간조차도 없이 시간은 빠르게도 흘러갔다.
이곳에 단 하나밖에 없는 60 개 병실의 작은 이 병원에 기숙사에는 영국에서 온 간호사 2명과 나를 포함해서 3명, 몇명의 보조 간호사와 함께 내 모든 정력을 쏟으면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곳이다. 함께 일을 하든 리사라는 헝가리언 보조 간호사는 쉬는 날이면 헝가리언의 대표음식 굴라쉬( Goulash)를 만들어 놓고 나를 자기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특별한 날이면 나를 한식구로 잊지 않고 대접해 주던 행정관 미스 호프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나의 인생에 각인된 힘들고 가슴 벅찬 시간들로 새겨져 있지만 이곳은 내생에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로는 경험이 별로 없는 내가 출산을 돕는 일도 거침없이 해 내곤 했다. 이렇게 시골병원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크다란 스트레스 없이 처음 시작한 이민 삶에 발판을 만들어준 현장 경험과 언어의 실습을 하루하루 제공해 주었던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떤 특정 병실을 맡아서 일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곳 어디서나 근무를 하면서 실무에 유익한 새로운 간호 지식과 언어를 배워갔다.
쉬는 날이면 나는 방문할 곳이 없었고, 나 혼자 기숙사에서 그림을 그린다든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성당을 방문하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민들을 하느님께 모두 내려놓고 기숙사로 행하던 그때가 지금은 새삼 그리워지는 시간에 와 있는 노인이 되었다. 10월이 되면 창밖으로 휘날리는 눈보라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쌓이고 쌓인 눈은 내 키를 넘곤 했다. 긴 겨울을 지내 야 하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헤아릴 수 없는 무서운 고독으로 다가왔다. 내가 외로워하는 것을 알게 된 간호원장은 가끔씩 “ 미스 전, 나하고 도시로 놀러 갈래요? 하고 나를 데리고 큰 도시인 지금의 선드베이로 가서 구경도 시켜주었다. 나의 짧은 언어에도 우리는 커다란 어려움 없이 대화할 수 있었고, 또 가슴을 열고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기억은 지금도 그때 내가 경험한 일들은 잊지 못할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때 캐나다란 대륙의 무한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 그리고 그곳에서 체득한 많은 이민 초년의 병원 경험은 다시 체험하지 못할 젊은 시절 나의 모험의 재산으로 간직하고 살아간다.
지금 이민오는 사람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무모한 나의 도전이었지만 그 어려웠던 결정은 두고두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노년의 내 삶에 기쁨을 안겨준다.
그때 인간의 본성속에 자리잡고 있는 외로움을 가슴깊이 체득했지만 그 체험의 선택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 공부를 더 하 고픈 열망 때문에 이곳 토론토로 돌아왔을 때 우연히 병원에서 만난 한 사나이, 나의 가슴속의 뼈저림의 외로움을 사랑의 가슴으로 품어준 나의 평생의 배우자, 남편을 만난 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 아닐 런지.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