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아보면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었던 순간들
현재는 서비스 기획 일을 한다. IT 분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건설 분야였으면 건축설계사, 의료/보건 분야였으면 상담사, 금융 분야였으면 컨설턴트 같은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론 분야였으면 기자가 되었고, 정치 분야였으면 비서실에 있었을까? 지금은 우연하게도 컴퓨터 공학과 밀접하게 일하고 있을 뿐이다.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모르겠을 때가 있어서 이런저런 글과 영상을 찾아본 적이 있다. 사람마다 돈, 명예, 권력 중에서 어느 것을 우선하는지에 따라 질문과 답변이 달라지겠지만,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남는 표현은 두 가지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쓸모없다고 이야기한대도 나는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일로 잘 되었을 때 배아픈 일' 이다.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지만, 내 생각엔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다. 다만 그 아이디어를, 그 생각을 남에게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방법에 따라 그 생각은 잡념이 될 수도,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방법은 쉽지 않고, 그렇기에 전문가가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걸 잘 한다고 하면, 대단해 보이면서도 질투가 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내가 기획 일을 하고 있는 이유이다.
난 10대 때 피아노를 쳤다. 내가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다니는 분위기였다. 피아노를 4살 무렵부터 처음 연주하기 시작한 나는 피아노가 너무 재미있었다. 유치원생, 초등학생을 지나 중학생 때도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남들보다 학원에 더 오래 다니게 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피아노 학원에는 여러가지 과일 모양이 그려진 연습장이 있었는데, 한 곡을 연주할 때마다 과일을 색칠하는 규칙이 있었다. 거짓으로 과일을 색칠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나는 한 곡을 다 연주했는데도 내 마음에 드는 연주가 아니면 과일을 색칠하지 않는 쪽이었다. 친구들은 한시간 내외면 집에 가는데, 나는 말리지 않으면 몇시간이고 계속 피아노를 쳤다. 지금은 이런 행위가 학원에 민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튼 나는 나만의 고집이 있는 어린이였다.
클래식 피아노로 대학 입시까지 바라봤으나 현실의 여러 문제로 인해 고등학교 3학년을 앞두고 진로를 바꿔야 했다. 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문과 반 학생이었다. 그냥 돈 많이 버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경영학과에 가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교 원서 접수를 시작했다. 가고 싶은 학교의 경영학과는 경쟁률이 너무 높았다. 표 아래를 보니 경제학과는 경쟁률이 좀 낮았다. 경영, 경제, 비슷한 거 배우겠지. 별 생각 없이 경제학과에 원서 접수를 했다. 오랜 시간 피아노 연습을 하면,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진다. 그 덕분에 바짝 공부해서 재수 없이 현역으로 꽤 괜찮은 학교의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되고 보니 경영학과 경제학은 정말 달랐다. 경영학은 발표 위주의 수업이 많아 보였고, 경제학은 늘 뭔가를 계산하고 그래프를 그려야 하는 학문이었다. 나는 수학을 좋아했는데, 경제학과에는 수학과 학생들이 학점사냥을 하러 올 정도로 수학이 많아서 좋았다. 문과생인데도 공학용 계산기로 뭔가를 계산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정말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술자리에서 만난 고학년 선배들이 경제학과에서 도망치라고 했다. 대학교 1학년 3월 마지막 주였다. 경제학과는 취업이 너무 안 되는데, 우리 학교는 다른 학교에 비해서 비교적 전과가 쉬우니, 가능하면 취업이 잘 되는 공대로 가라고 했다. 그 무렵 친하게 지내던 2학년 한 선배는 산업공학과로 전과 준비를, 다른 선배는 약대 편입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술자리 시시껄렁한 농담이 아니었던 거다. 공대로 전과하면 기본교양으로 물화생지를 이수해야 했다. 문과생인 내가 물화생지로 공대생들과 함께 점수내기를 해야 한다고? 미친 소리로 들렸다.
그때의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했어서 여러 모임과 술자리에 갔다. 졸업하고 취업한 지 얼마 안 된 선배들도 만났다. 주로 은행원 또는 공무원이 되었거나 노무사, 세무사 자격증을 딴 선배들이 의기양양했다. 스무살짜리였던 내 생각에는 저런 직업들은 꽉 막힌 상사들이랑 일할텐데 너무 답답하겠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축하했지만 속으로는 인정할 수 없었다. '저런 일을 하는 게 멋있다고? 난 아닌데. 자기가 잘 됐으니까 자랑하는 거겠지? 그럼 잘 안됐으면 얼마나 더 답답한 일을 할까?' 라는 건방진 생각을 했다. 빨리 이 바닥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은행원, 공무원, 노무사, 세무사로 일하고 계신 분들, 그리고 경제학과 관련된 일을 하고 계신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난 그런 일을 할 능력도 안 되고, 아예 내가 못 하는 분야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벗어나 무슨 전공을 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이유를 생각해 봤던 것 같다. 돈이 없어서 피아노 전공을 못 했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제약이 없고 싶었다. 그러려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야 하고, 나만의 실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내가 약한 자연과학 학문을 덜 다루는 전공은 산업공학과, 컴퓨터공학과, 건축공학과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내가 생각한 기술직에 가까운 곳은 컴퓨터공학과였다.
그렇게 나는 1학년 2학기부터 컴퓨터공학과 학생들이 듣는 수업들을 수강하며 전과 준비를 했다. 심지어 엇학기였다. 난 문과생이고 물리를 처음 공부하는데, 같은 반의 다른 분들은 물리를 재수강하는 고학년 공대생들이었다. 나의 첫 C언어 실습 수업의 경쟁자들은 나보다 다섯 학번 위의 컴퓨터공학과 졸업유예생들이었다. 난 그렇게 재수강하는 고학년 학생들과 함께 몇 학기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을 다 듣고 나면 전과에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매일 6시간씩 알바도 했다. 고백하자면 성적을 아주 잘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근데 난 간절했다. 무턱대고 학과장 교수님을 찾아가서, 꼭 배우고 싶다고 빌었다. 전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2학년 2학기에 전과에 성공해서, 3학년 1학기부터는 공대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다.
난 이미 남들보다 뒤쳐져 있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하려고 했다. 더 공부하고 싶어서 코딩 스터디 모임에도 들어갔다. 3학년 1학기를 앞둔 겨울 방학에 캠퍼스를 돌아다니면서 스터디를 모집하는 포스터를 찾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코딩 스터디가 대중적이지 않았다. 스터디에 가면 코딩 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난 울면서 코딩했다.
스터디만으로는 부족했다. 개강한 후에 교수님을 귀찮게 하니 대학원생을 소개받았고, 그 대학원생이 운영하는 웹 에이전시 사무실에서 공부하면서 일할 수 있게 됐다. 작은 웹 프로젝트 정도는 직접 만들 수 있게 된 거다. 대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개발하는 게 재미있었다. 여전히 알바도 해야 됐다. 그렇게 알바, 학교 생활, 사무실 출근을 병행하면서 대학교 생활을 했다.
그러다 정보 시각화를 다루는 인포그래픽 수업에서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내가 남들보다 발표를 잘 한다는 자신감이었다. 팀 프로젝트를 하는 수업이었는데, 팀마다 진행상황을 매주 발표해야 했다. 나는 발표에 흡입력이 있고, 마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생각해 보니, 나만 문과 출신이었다.
더 기막힌 점은, 코딩 스터디를 함께한 선배들이 학점이 남는다며 인포그래픽 수업에 들어와 나와 팀을 해준 것이다. 이 선배들은 어느 대회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기가 막힌 코딩 귀신들인데, 미안하지만 언변은 좀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이걸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전체 그림을 그리면, 선배들은 그대로 구현해줬다. 난 그걸 잘 포장해서 발표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게 서비스 기획자의 역할이랑 비슷하다. 내 대학교 인생 처음으로 A+를 받았고, 교수님과 친해져 미국 학회에 따라가는 경험도 했다. 돈을 벌어야 해서 대학원에는 안 갔다.
고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취업 고민을 했다. 전과하면서 새로 사귄 친구나 선배가 별로 없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주변의 경제학과 선배들이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취업 준비를 하는 것이 보여지니 나도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 한 학기를 휴학하고 공공기관에서 전산직 인턴을 5개월 하고, 이후에는 거기서 알게 된 인연으로 외주 개발을 3개월 했다. 좋은 분들과 함께했지만 그런 조직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요즘도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거지만 출근룩으로 로엠, SOUP 같은 느낌의 참한 며느리 스타일을 입어야 하는 회사는 내 성향상 좀 어렵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서비스 기획자라는 직업이 있는지 몰랐다.
웹 에이전시 사무실에도 계속 출근했다. 내가 보고 들어왔던 대학원생이 박사 과정을 마무리하며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 기분이 묘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저렇게 코딩을 잘 하는데, 왜 취업 준비를 하시지?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나도 취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인턴 경험을 바탕으로 취업 선택지에서 공기업, 공공기관, 은행 같은 곳들을 다 제외했다. IT 업계에는 코딩을 하는 사람과 코딩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앞의 기업들은 대부분 직접 코딩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멋지지 않다고도 생각했다(어린 시절의 건방진 생각이고, 지금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졸업하고 한 학기 동안 구직활동을 하면서 여러 회사의 문을 두드렸고, 이 때 서비스 기획자라는 직무를 알게 됐다.
잠시 현 시점으로 돌아와서 약간 불평을 하자면, 이 직업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누가 좀 통일해 줬으면 좋겠다. 서비스 기획자, PM, PO 로 불리는 직무이다. 심지어 PM은 프로덕트 매니저인 곳도 있고, 프로젝트 매니저인 곳도 있다. 이런 애매한 표기 때문에 (상대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취업사기를 당한 적도 있다. 엄연히 다르다는데 회사마다 정의가 다르고, 아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 똑같은 일이다.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라.. 사실 서비스 기획자의 서비스라는 표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단은 서비스 기획자라고 부르고 있다.
어쨌든 서비스 기획자의 직무 설명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총괄한다니. 그래서인지 신입 서비스 기획자를 채용하는 곳은 매우 드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이 프로젝트를 총괄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다른 지원자와 다른 내 장점은, 개발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걸 잘 어필해서, 직원 100명 내외의 스타트업에 입사하게 됐다. 그러기까지 개발 프리랜서 일도 했다. 회사에서 일어난 일들은 다음 글에 이어서 작성한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선택들은 대부분 이기적이다. 피아노를 오래 쳤던 일도, 경쟁률이 낮아서 경제학과에 원서를 넣었던 일도, 선배의 말 한마디에 컴퓨터공학과로 전과를 준비했던 일도, 개발을 해놓고 기획자로 취업을 준비했던 일도 그렇다. 당시에는 그 선택들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니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경험들이 지금의 일을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오래 앉아 연습하던 습관은 공부하는 힘이 되었다. 문과에서 공대로 건너온 경험은 사람과 개발 사이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발표를 좋아했던 성격은 지금도 여전히 제안을 나가거나 컨설팅을 할 때 쓰이고 있다.
나는 mbti 검사를 하면 늘 T 유형으로 분리되지만, 사실 인간의 결정과 선택은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이유가 부족하고,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논리는 결과에 따라서 붙이면 그만이다. 그래서 많은 선택들이 쓸모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선택은 나중에야 의미가 생긴다. 그때는 그냥 했던 일이,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하나의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선택들 중에도, 언젠가 뒤늦게 이유가 생기는 것들이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