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
직장에서의 모든 의사결정은 효율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조직은 그랬다. 대부분의 결정은 감정적이고, 논리적이지 않다. 이해는 된다. 회사는 사람이 모여 일하는 곳이다. 그래서 인간관계, 그중에서도 감정 관리가 중요해진다. 그래서 조직 안에서는 비효율적이고 논리가 없다고 느껴지더라도 실세의 의견에 동조하며 조용히 맡은 일을 해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되기도 한다.
결국 사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에게 회사 생활의 성공 여부는 단순하다. 남아있느냐, 떠나느냐. 오래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고 하지 않는가? 부서 변경을 하든, 이직을 하든, 결과적으로 회사라는 조직에 오래 남아있는 것이야말로 회사 생활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난 회사 생활에 실패한 쪽이다.
처음에는 적응하려고 했다. 조직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채용 공고에서 말하는 ‘자기주도적인 사람’과 실제 조직이 원하는 사람 사이의 괴리가 보였다.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방향은 수시로 바뀌고, 때로는 그 방향조차 명확하지 않다. 결국 누군가는 그걸 알아서 맞춰야 한다. 내가 했던 일이 기획이어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적극적인 사람을 찾는다’는 말을 다르게 읽는다. 권한은 없지만 책임은 질 사람.
주니어 때는 단순한 의문에 가까웠다. ‘이건 왜 이렇게 돌아가지?’. 그때는 그저 같이 일할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일이 아니라, 일이 굴러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정리할 수 있는 문제인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서도 결정을 미루고,
결론이 없는 회의가 반복된다. 회의는 길어지지만, 회의를 효율적으로 줄이려는 시도는 없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지만, 오래 논의했다는 사실로 일이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 이상하게도, 그 모든 비효율은 늘 같은 말로 정리된다.
“원래 그런 거야.”
나는 왜 혼자 일하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대부분은 길게 설명하기 번거로워서 '이게 제 스타일이에요' 라고 답한다. 조금 더 깊게 묻는 사람에게는,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다니면서 사업 종료, 부서 해체, 경영 악화로 권고사직을 세번 겪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끔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도 받는다.
돌이켜보면 임팩트 있는 사건들은 있었다. 하지만 가치관을 한 번에 뒤집을 만큼의 단일한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직장인으로 회사를 다니는 동안 비슷한 종류의 일들이 반복됐다. 더 나은 방법이 있어도 기존 방식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일을 다시 검토하는 회의, 책임은 분산되어 있지만 권한은 없는 구조. 하나하나는 사소했다. 하지만 그 사소한 것들이 쌓이면서, 한 가지 결론으로 모였다.
여기서는 내가 잘할수록 더 비효율적인 사람이 된다.
그 시점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가 아니라, '이 구조 안에서 잘하는게 의미가 있는가'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로 정리했다. 내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결과가 어디까지 반영되는 구조인가의 문제이다. 회사 안에서의 성과는 결국 정해진 틀 안에서만 보상된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더 잘한다고 해서 그만큼 더 가져갈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그 기준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유치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회사생활에서의 평가는 실무 능력과 정치력의 조합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나는 후자를 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거나, 관계를 위해 판단을 유보하는 방식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실무 능력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을까.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라는 구조 안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정치력을 키워서 더 고급 직장인이 되거나, 그게 필요없는 환경으로 나가거나.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좋게 말하면 선택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회피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고정 수입, 안정성, 사회적 위치,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직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감정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계산을 했다. 회사 생활 4년차부터였다. 지금 구조 안에서 계속 일할 때의 기대값과, 밖으로 나갔을 때의 기대값. 단기적으로는 회사에 남는 편이 분명히 유리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확신이 없었다. 반대로 밖으로 나가는 선택은 불확실했지만, 적어도 방향만큼은 내가 통제할 수 있었다.
크루즈에서 접시를 닦는 대신, 작은 통통배 한 척이라도 직접 움직여 보고 싶었다. 결국 나를 움직인 건 감정이 아닌 구조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구조 안에서 성과를 만드는 것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했다.
회사에서 하던 일로 회사 밖에서 돈을 벌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시작이 얼마나 어려운지. 프리랜서로 살겠다고 선언하더라도 퇴사 다음날 바로 돈이 벌리지는 않는다. 직장인일 때는 이직할 때만 꺼내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프리랜서가 되면 항상 업데이트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내 일을 외부에 공개하고, 스스로를 계속 증명해야 한다. 일감은 일정하지 않고, 내 포트폴리오에 맞는 일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개인 프리랜서뿐 아니라 에이전시와도 경쟁해야 한다.
일을 따낸 이후도 문제다. 계약서 검토(때로는 내가 초안까지 작성해야 한다), 실무, 비용 처리, 세금 계산, 국민연금과 건강보험까지 전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프리랜서가 아닌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면 생각할 것이 훨씬 많다. 사업이야말로 프리랜서보다 돈을 버는 구조를 만드는 데에 훨씬 공들여야 한다. 회사에서 하던 일로 시작하겠다면 그나마 아는 분야니까 어떻게 시작할 지는 대략 알 것이다. 아예 새로운 일을 하겠다면 방향을 잡는 것조차 어렵다. 신경 쓸 일은 끝이 없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가능한 시나리오를 모두 적어보고, 그중에서 버틸 수 있는 구조를 찾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시간날 때마다 첨삭했다.
회사는 편하다. 시스템이 있고, 다른 부서가 나눠서 부담해주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 편함은 비용이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시간, 납득하지 못하는 결정을 따라야 하는 순간들. 그 비용을 계속 지불할 만큼, 회사가 주는 이익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차근차근 준비해왔다. 더 나은 선택이라서가 아니라, 덜 비효율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에.
퇴사 관련 콘텐츠를 보면 비슷한 조언이 반복된다.
"회사 밖에서 월급 이상의 수입, 최소한 절반 정도의 구조를 만들고 퇴사하세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이 조언을 일종의 안전장치처럼 느낀다. 섣불리 퇴사를 권했다가 욕먹을 짓을 회피하기 위한 조건처럼.
난 벼락부자가 되는 것, 갑자기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은 모른다. 나도 궁금하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돈 버는 구조를 새로 만드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회사 밖에서 수익 기반을 만들기에는 퇴근 후 시간만으로는 부족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지식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퇴근 후의 상태는 이미 상당부분 에너지를 소모한 이후다. 남은 집중력으로 새로운 일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출근 전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중간에 흐름이 끊기면서 발생하는 전환 비용이 크다. 결국 동시에 여러가지를 제대로 해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나는 인간의 인풋과 아웃풋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대부분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생산적인 사고와 실행을 이어가기 쉽지 않다.
물론 각자의 상황은 다르다.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이거나,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선택의 기준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모든 조건을 고려했음에도 회사 밖을 고민하고 있다면, 방향은 분명해야 한다. 회사 안에서 하던 돈버는 방식을, 회사 밖으로 옮긴다는 전제. 그리고 그 전환을 위해 할 수 있는 준비를 충분히 했다면, 나는 한 번쯤은 나와보는 선택도 현실적인 옵션이라고 본다.
회사원인 상태와, 아무것에도 속해 있지 않은 상태의 마음은 완전히 다르다. 퇴근 후에 부업을 준비하는 것과, 퇴사 후에 생계를 준비하는 것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퇴근 후에는 회사 일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고, 내 일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퇴사 이후에는 단순해진다. 내 일만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스스로에 대한 책임도 커진다. 다음 달에 들어올 월급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해내야 한다는 전제가 생긴다. 돌아갈 곳이 없는 상태, 일종의 배수의 진을 치는 것. 나는 그 환경이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든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