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체질이 아닌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직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하는 것을 그만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흐르며 생각이 바뀔 수도 있어서 일단은 ‘아닌 것 같다’인 상태이다. 본인이 회사 체질이라며 말하고 다니는 사람을 많이 보진 못했지만, 난 정말 견디지 못할 지경이어서 뛰쳐나왔다.
같은 일을 계속하는 게 지루했다.
같은 프로젝트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여러 안의 발전 방향을 고민해 보고 윗선에 제안해 봐도 결국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예산이 없어서, 더 급한 다른 일이 있어서, 인력이 모자라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하지 못한다며 거절당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거절당하는 것은 괜찮다. 기획자는 자기 기획안이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데 거절당하는 이유는 늘 논리적이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정해졌다더라, 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게 반복돼서 새로운 일을 벌일 수가 없었다. 지루한 일만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내가 경험한 모든 회사에서 그랬다.
나는 내 문제가 뭔지 알아내려고 했다. 나처럼 같은 일을 계속하는 것을 지루해하면서도, 나와는 다르게 직장에 잘 다니는 친구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는 엘리트들만 다닌다는 글로벌 컨설팅 펌에서 맡은 프로젝트에 따라 파견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금요일, 상사와의 원격 미팅만을 남겨두고 우리 집에 온 친구는 정말 멋진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늘 그렇게 입고 다니냐고 질문했고, 친구는 다들 꾸미고 다녀서 자신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친구는 노트북을 켜고 서서 상사에게 자신의 셀프 평가 자료를 보고했다. 약간 긴장한 상태로 차가운 목소리를 내는 친구의 모습을 힐긋거리니 체하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는 금방 질려하는 자신에게 딱 맞는 직장을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집에 온 지 세 시간 만에 집에 가야 한다는 친구를 보내고 든 생각은, 늘 긴장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같은 일을 계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같은 동료들과 부딪히는 게 싫었다.
매일 같은 얼굴을 보며 심리적인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도 피곤했다. 나는 가끔 그들의 고민과 불만을 듣기만 해야 했다. 사건사고 없이 잘 지내야 하니까 듣기 싫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인격적 모독을 느끼지 않는 건전한 피드백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고장 난 조명이나 원인 모를 악취와 같은 환경적인 문제부터, 업무에 관련된 것들도 신경 쓰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물을 가득 받아 넘치기 직전의 양동이처럼 늘 최대의 긴장 상태였다. 참다못해 말하고 나니, 언제부터인가 나는 예민충 취급을 받고 있었다. 동료들은 사석에서 나를 멀리하더니, 업무와 관련된 의사결정에서도 나를 제외하고 진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동료에게 내 고민을 말할 수 없게 됐다.
풀재택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해 보기도 했다. 사담을 쳐내지 않아도 되니까 편했다. 이미 친한 사람들끼리는 시시껄렁한 DM을 주고받는 모양이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나는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종인데도 굳이 사무실 출근을 해야 하는 조직은 '직원 평가 지표가 없어서 눈앞에 사람을 앉혀놓고 평가하려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영락없는 회사 부적응자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문제는 그 평가 지표가 합리적이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비리그 대학교 출신이 아니라서 대화에 끼워 주질 않더니, 점점 어디어디 출신으로 이루어진 커뮤니티를 형성해 놓고는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실적이 나오지 않는 작은 업무를 배정했다. 그리고는 실적이 나오지 않아서 낮은 평가를 주고는 회사를 떠나라고 종용했다.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매일 같은 동료와 일하면서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너무 피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이 '숨겨진 의도를 파악' 하는 능력으로 먹고살고 있다.)
불합리한 것을 참고 견디는 게 싫었다.
평가 지표, 권한 부여 기준, 급여 책정 기준을 비롯한 많은 규칙에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을 참고 견뎌야 근속할 수 있었다. 아무리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받아하며 근속하기는 싫었다. 큰 목표를 위해 참고 기다리는 것도 훌륭한 덕목이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경험하는 것도 소중한 내 인생의 일부분이다. 나에게는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했다.
회사가 내 등을 떠밀기도 했지만 내가 회사 밖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도 했다. 창의적인 일을 하고, 내 사업을 만들어 키우고,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고 싶었다. 뭔가 구체적인 것이 나를 엄청난 힘으로 끌어당기는 건 아니었지만, 회사에 있으면 그게 뭔지 모를 것이라는 확신만큼은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좋고, 바쁘게 일하는 것도 좋다. 평가당하거나 평가하는 것도 좋다. 책임감을 느끼며 의사결정을 하는 것도 좋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따르며 돕는 것도 좋다. 남의 고민과 걱정을 들어주는 것도 좋다. 내 시간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에 쓰는 것도 좋다.
그런 것들을 모두 경험하는 회사에는 왜 적응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나는 아직도 내가 왜 그런지 확실하게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냥 운이 안 좋았다고 말하기에는 찝찝하다. 차라리 내가 별 불만 없는 무던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고민을 하고 글을 쓸 시간마저 아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이런 내가 좋다. 내게 맞는 게 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내게 맞는 환경 세팅을 스스로 하는 내 모습이 좋다.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내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걸 해결하려고 시도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내가 이렇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게 맞는 환경을 끊임없이 세팅해 보고, 실패하면 빨리 털어내고 일어나서 다시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는 것, 그게 내게 더 도움이 된다. 하기 싫은 것은 안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계속 찾는다. 그게 나랑 더 잘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