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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양섭 Nov 19. 2022

千佛千塔 운주사에 다녀와서

  오랜 직장생활에서 놓여나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딱히 계획은 없었는데 여정은 문학 동호회의 지인들과 연락이 이어지면서 길 따라 사람 따라 길어지고 있었다. 강원도 정선 산골에 혼자 사는 아우와 쏟아지는 별빛 속에 하룻밤을 꿈같이 보냈고, 포항에서 이틀 동안 선배의 환대를 받았다. 친구가 사는 광주에 와서 무등산에 올랐다가 저녁에는 더 모인 지인들과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다음날, 술이 덜 깬 나를 태우고 친구는 꼭 가봐야 할 곳이라며 차를 몰았다.

  운주사 주차장에 내렸을 때, 눈이 부셨고 입이 벌어졌고 지잉~ 정수리로 들어오는 떨림이 있었다. 포항에서 선배의 안내로 오어사에 갔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기운이었다. 오어사는 우묵한 지형에 절과 물과 산에 천년의 기운이 가라앉아 고여 있는 듯하였다. 그러니 거기에 다가서는 나도 그 기운에 젖어 드는 느낌으로 시공의 경계를 건너가는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 운주사 일주문을 들어서 비포장 길을 걸을 때의 느낌은 곳곳의 석탑과 석불들로 하여 여기저기 온통 천년 전의 기운이 배여 있었다. 나는 쉬 젖어 들지 못하고 더욱 몸을 비벼 넣으며 느껴야만 했다. 세월의 진액이 배어든 웅혼한 정령이 서린 9층 석탑은 바람처럼 스치는 나그네 발길을 잡고 세월을 되돌렸다. 합장하고 우러러 한 바퀴 돌며 뒤돌아섰을 때, 아! 햇살, 오후의 햇살이 석탑에 광휘를 부여하며 나를 비추었다. 천년이 이어진 햇살이었다. 천불과 천탑이 있었다는 길가의 돌 하나에도 천년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나는 켜켜이 쌓인 세월을 보았다.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고 잠시 입정하였다. 친구의 안내로 옆 산자락으로 올라 머슴부처를 보고 유명한 와불이 있는 곳으로 갔다. 머리가 더 낮게 자리하고 있어 퍽 불편해 보였다. 절을 하고 탑돌이를 하는 양으로 언저리를 돌았다. 솔숲 사이로 커다란 주홍빛 원이 떨어지고 있었다. 해가 저리 클까? 자세히 보려니 솔가지가 그냥 그리 알라는 듯 시선을 가리고, 그 너머 먼 산 위로 부푼 구름이 둥그렇게 물들어 있었다. 여기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인가, 나는 해지는 광경을 더 보려 머뭇거리다가 친구가 기다려서 내려왔다. 곳곳에 널린 석불은 대부분 아마추어가 만든 모양으로 형상이 뭉툭하고 이목구비가 제각각이었다. 하늘의 석공들이 내려와 하룻밤에 만들었다는 전설은 별개로 하고, 내 생각으로는 천년도 훨씬 전에 동네의 재앙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일치 단합하여 잘 만드는 사람 못 만드는 사람 구별 없이 염원을 담아 나름의 성의를 다하여 불상을 만들어 바친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 순수성과 정감이 어린 민초들의 기운이 이어지고 전해지는 역사의 뒤안길이었다. 

  천천히 올라갔던 그 길로 찬바람 맞으며 다시 내려오는데 나는 알지 못할 회한에 잠시 빠졌다. 천년의 기운을 뒤로하고 지금의 내 삶에 다가서야 하는 아쉬움과 내 존재의 가치와 역할에 연연하는 마음이 무거웠다. 무상(無常)이란 말은 그냥 '덧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찰나의 순간에도 변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말일진대, 오늘에야 갑자기 천년 세월의 더께를 입고 선 돌 조각 앞에 괜스레 처연한 감정에 휩싸일 까닭도 아니었다. 내 살아있음으로 하여 좋은 친구와 함께 이런 세월의 깊이를 더듬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즐거운 일이었다. 내 마음에 들어온 이 정경과 느낌을 담아두면 생각일랑 다른 때에 또 다른 각도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새삼 친구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밝음이 역할을 다한 듯 자리를 내어주고 어둠이 천천히 산천을 장악하기 전, 하늘빛은 참으로 깊은 단 한 번의 순간을 연출한다. 서녘 하늘의 노을은 먼저 가신 아버지의 미소처럼 사라지고 장중한 어둠이 천천히 수묵화를 그리며 안온하게 다가서면, 하늘은 어느새 또 다른 모양으로 열리며 별들을 하나 둘 쏟아 놓는다. 


  연이틀 주말의 귀한 시간을 온통 내게 할애한 친구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 지금껏 내 삶이 강퍅했는지 몰라도 목적 없이 베푸는 이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이를 따져 채무 감정을 갖는 것은 친구 성의를 외려 훼손하는 듯하여 내 합리화 삼아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이는 친구에게만이 아니라 이번 여행에서 만난 곳곳의 고마운 사람들에게 정중히 감사드리며, 아울러 현세에 나와 인연 지어진 소중한 사람들에게 갖는 나의 마음이기도 하겠다. 

  하나는, '지게 이야기'이다. 인생이란 지게를 지고 가는 길이라고 보면, 그 지게에 적당한 짐이 얹혀 있을 때 발걸음과 자세도 안정된다. 또 짐을 챙기려는 정신을 줄곧 가다듬어야 할 테고, 힘을 써 땀을 흘린 후의 시원한 바람과 보람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본분에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야 할 짐 속에는 삶의 목적이나 인연의 고리나 책임과 의무 등 갖가지가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베풀거나 신세 진 기억도 포함되겠고, 누구에게 상처를 주거나 입은 기억도 있겠다. 그런 삶의 애환을 초탈하여서 지게마저 벗어버리고, 수도승처럼 살 수 없을 바에는, 이런 인간적인 부담감 같은 것도 얼마큼은 그 짐의 무게에 보태져야 하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의 손을 거친 음식을 먹고 누군가 쓴 책을 읽고 누군가 만든 물건을 사용하며 신세를 지고 있지 않은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당연시하였는지 모른다. 어찌 모든 상품과 용역과 성심이 물질적인 대가로 상쇄될 가치일까.

  둘은, 우리가 사는 존재계(存在界)에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순환의 법칙'이다. 이는 우주 기운의 운행이나 파장의 전파 법칙과 통하는 면이 있다. 내가 어떤 대상에게 알게 모르게 물질이나 기운을 전하게 되면, 그 당사자로부터 내게 되돌아오기도 하지만, 그 대상은 다른 대상에게 그 기운이나 물질을 전하게 되고, 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변형된 기운이나 물질을 받는다고 본다. 내가 베풀거나 저지른 것으로 내 가족이 받기도 하고, 내 가까운 사람의 베풂이나 저지름으로 내가 그것을 되받기도 한다. 이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시간 흐름에 따라 증폭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며 이를 복(福)이나 화(禍)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어떤 베풂과 저지름으로 이런 결과를 얻게 되었나 생각해 볼 일이며, 내가 부족하여도 형태를 바꾸어 몸과 마음으로 좋은 기운을 대상에게 보내야 하는 이치이다. 고마운 인연들이 많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데 우리는 자기 안에 갇혀서 미처 그 인식을 못 할 수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과분한 신세를 졌다. 그들의 선한 마음과 순수한 호의를 잊지 않으며 나는 또 다른 대상에게 증폭시켜 베풀고 봉사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진다. 친구 덕분에 빠져든 천년고찰 운주사와 천년 세월 너머 선인들의 기운도 그렇게 이어져 와서 그걸 받은 나는 또 새로워졌고 나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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