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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Oct 11. 2022

먹다가 못 볼뻔한 낙산사

강원도 양양

지난 봄, 남편이 출장 예정이라며 양양행을 알렸다.


양양? SNS에서 핫한 서피비치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데..


그가 일정에 참석하는 동안 나에겐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터였다. 언제 또 방방곡곡을 누벼보겠나 싶어 냉큼 따라나섰다.


직장생활 내내 나를 버티게 해 주는 근간은 1년 전 미리 끊어놓는 비행기 티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외여행 일정 잡아놓고 그날만 보고 '존버'하는 패턴'이 코로나 창궐로 인해 와장창 깨져버리기 전까지는.


다시 돌아와서, 어쨌거나 이러한 나의 여행지 편식에 뒷전으로 밀려나던 국내를 다녀볼 수 있어 잘되었다.


어디를 가든 '먹는 것'을 가장 중시하기에 따라가서  맛집들을 들러보고 바닷바람이나 쐬다 올 요량이었다.




처음 만난 양양 낙산사 인근은 다소 썰렁했다. 본격 여름휴가철을 아직 앞두어서일까, 코시국의 여파일까. 가게들과 상가들 상당 수가 폐업, 휴업 중이어서 '을씨년스럽다'는 것이 솔직한 첫인상이었다.


남편은 회의에 참석하러 가고, 혼자서 본격 쏘다니기 시작했는데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서는 것이 대체 얼마만인가 싶어 두려울 정도로 두근대며 설레기 시작했다.


해안가를 따라 도로를 달리면 수많은 해변들이 나오는데, 그중 가장 평화로웠던 해변은 잔교해변이었다. 지명이 잔교리인 것 같았는데, 처음엔 잔고리해변으로 잘못 읽어 어디가 잔고리 모양이라는 건지 찾으려 했다. 자세히 보니 잔교(리)해변!

해안 동쪽 편에 무료 주차장이 제공되는 데다 나뿐이어서 여유 그 자체였던 잔교해변. 잠시 주차하고 운전석, 조수석 문을 열어두니 맞바람이 솔솔 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해변을 걷다 보니, 동쪽 끝부터 군사작전지역이라는 팻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차 안에 앉아 챙겨 온 법정스님의 '행복한 삶'을 꺼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 책을 읽기에 더 완벽한 순간이 있으려나. 몇 장 읽다 보니 적당한 바람과 온도와 파도소리가 엄청난 졸음을 선사한다. 뭐 어쩌겠나 한숨 자야지.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그 유명한 서피비치를 들러보았다. 모래장난과 돗자리 깔기가 허용되지 않는 해변. 정 중앙에 빵빵한 사운드의 힙한 펍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동남아 휴양지 해변을 모티브로 한 것 같은데 그래도 2% 부족한 느낌. 이곳에서 서핑까지 즐긴다면 의미가 커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 정도였다.


다음 호기심이 향한 곳은 '범부리'라는 지역. 그곳에 눈여겨본 메밀막국수집이 있기 때문. 비빔으로 한 그릇 뚝딱했다. 면발이 뚝뚝 끊기며 혀에 까슬까슬하게 닿는 식감인 걸로 봐서 순메밀 100% 인 듯했다. 나는 쫀득하고 찰기가 있는 면을 좋아하긴 하지만, 메밀의 고장에서 여유로이 먹는 막국수는 누가 뭐래도 훌륭하고 감사한 한 끼였다.


구수한 막국수 한 그릇, 식당 앞에 피어있던 향 좋은 꽃.

밥을 다 먹어갈 무렵, 인근에 고인돌 유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바로 내비게이션 목적지로 설정했다.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꼼짝없이 후진해야 하는, 근데 차마 못하겠는 좁고 구불거리는 길을 굽이굽이 지나 마침내 도착했다.

범부리 고인돌 진입로와 주인공

어렵게 풀을 헤치고 들어가 보니, 에게게? 이게 뭐야- 싶다. 이왕 온 거 알고라도 가자 싶어 팻말을 읽어보니 청동기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란다. 깊은 산골짜기 시골인 이곳에 천 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살다 떠났구나. 오늘 내가 이렇게 올 줄 알았을까. 오버스럽지만 유구한 시간이 주는 갬성에 잠깐 발을 담갔다 뺐다. 그나저나 이렇게 작은 돌덩이 아래의 공간에 사람을 어떻게 안치(?)했던 것인지 고인돌을 볼 때마다 궁금하긴 하다.




해가 지고 일정을 마친 남편과 접선했다. 동해에 왔으니 회를 먹어보자며 숙소 인근으로 걸어 나갔다. 바로 앞에 바다를 끼고 있는 포차식 회센터가 있었다. 가게에서 횟감을 선택하면, 바다 뷰의 테이블로 떠서 가져다주시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관광지 덤터기를 제대로 쓸 것만 같은 불길한 입지와 스타일이어서 처음엔 그곳에 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근데 그중 한 가게가 자연산 회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는 리뷰를 보았다면서, 구글 리뷰 맹신자 남편이 고집하는 통에, 결국 가보기로 했다.

    

오직 회로만 승부 보던 물치항 혜숙이네.

결과는 의외로 JMT 대성공 그 자체였다. 콘마요, 찐 새우 등 '횟집의 클리셰'와 같은 당연한 스끼다시들은 기미조차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횟감으로 승부 보는 곳이었다. 전채요리로 내주신 전복, 오징어회는 인생을 통틀어 손꼽힐 정도로 달고 신선했고, 임연수 구이 또한 돈 주고 따로 시켜먹으라 해도 납득이 되는 수준이었다. 메인 회는 말할 것도 없었고, 도중에 잘 먹는다고 서비스로 내주신 찐 가리비도 감동이었다. 매운탕을 어디선가 조달(?) 해 오시는 건지 영업 뛰시는 아저씨께 따로 현금을 지불하고 시켜야 하는 것이 좀 불편했지만, 그 또한 맛이 좋아 용납 되었다. 원래 저녁에 낙산사를 방문하기로 했는 데 얼큰하게 취하고 말았다.




다음 날, 점심에 시간이 난 남편과 함께 송이 샤부샤부를 먹으러 알아봐 놓은 식당에 갔다. 양양의 특산물 중 하나가 송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송이를 참기름 소금장에 찍어 행복하게 드시던 아빠의 입맛이 드디어 이해가 되기 시작한 내 나이 33살. 일단 한 번 느끼고 나니 중독성이 엄청나다. 남편에게도 알려주고 싶었고 소망을 이루었다. 송이 육수에 얇은 소고기를 데쳐 야금야금 먹은 뒤 칼국수 사리로 야무지게 식사를 마쳤다. 곁들인 송이주는 송이향이 나진 않았지만 기분을 더해주었다.

송이 제철은 가을이라고 한다. 우리가 먹는 건 작년 가을산을 냉동해두었던 것이라고. 정말 제대로 맛보고 싶다면 제철에 오라셨다. 지금도 충분히 그윽하고 고급진 맛인걸요.




마지막 날 저녁은 돼지갈비였다. '이태원 왕갈비'라는 해변과는 다소 언발란스한 상호에, 멀끔한 내외관을 뽐내는 식당이었다. 긴가민가 했지만 구글 리뷰가 매우 좋은 편이어서 기대를 하며 방문했는데 역시나 평일 저녁임에도 대기가 있었다. 40분가량의 기다림 끝에 입장했고 결과는 매우 만족이었다. 해변에서 웬 돼지갈비냐며 잠시나마 의심했던 나의 하찮은 촉이라니.

특히나 여기서 처음 마셔본 지역 소주 '동해'는 매우 순하면서 부드러웠는데, 단짠 돼지갈비와 찰떡궁합이었다. 너무 감동을 받아 그만 우리는 부모님께 갖다 드린다며 포장까지 했다(택배는 안 하신 댔다). 문제는 포장 고객이 많지 않은지 영 어설픈 용기에 담아주셔서 묵는 호텔의 대형 냉장고에 보관을 부탁해야 했고, 더 큰 문제는 다음 날 꽤 더운 낮 동안 상하지 않게 온전히 배달해야 했다는 것.


결국 양양의 손꼽히는 랜드마크인 낙산사는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길을 나섰다. 남편은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내달리고, 나는 갈비 담긴 용기를 다리 아래 에어컨 송풍구에 갖다 댄 채 한껏 긴장했다.

해안절벽 위의 낙산사. 불이 나서 07년도에 재건되었고 방문한 사람들이 소망을 달아두었는데 재미있는 게 많았다.

 

갈비가 낙산사를 이기며 양양 원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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