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앞에 장사 없다'

어느 '어르신의 독백'-12

by 주호석

아내가 직장에서 만나 은퇴한 지금까지도 사랑하는 조카처럼 아끼는 후배가 있다. 캐네디언 존 John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고 있는 그 후배는 아내를 이모라 부른다. 아이들은 아내를 빅마마, 나를 빅대디라고 부른다. 워낙 가까이 지내는 터라 서로 집에도 자주 오고 가는 사이다. 얼마 전 새해를 맞아 그 가족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아내와 나에게 주려고 이런저런 선물을 한 보따리 챙겨 들고 왔다. 선물보따리를 풀면서 '이건 빅대디 선물입니다' 하고 술병을 하나 건네주었다. 헤네시 꼬냑이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술 선물이었다. 원래 술을 좋아하다 보니 누군가로부터 술 선물을 받을 때면 무척 기분 좋아하는 나다. 이번에도 물론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도수가 높으면서도 부드러운 맛과 향이 느껴지는 꼬냑 브랜디여서 더 그랬다.


선물을 받든 내가 직접 구입하든 내가 좋아하는 술을 얻게 되면 곧바로 병을 열고 브랜디의 향과 맛을 음미하는 게 습관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술병을 열지 않았다. 함께 대작할 John이 맥주 외에는 다른 술을 안 마시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40도짜리 독주를 마시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독주든 부드러운 술이든 주종 불문하고 음주를 즐겼는데 최근 들어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보통 알코올도수 40도인 위스키나 브랜디를 마시고 나면 몸이 견뎌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낮은 도수의 맥주나 와인 같은 경우도 주량이 확 줄어서 술 생각이 나면 와인 한잔 정도 마시는 걸로 대신하고는 한다. 덕분에 주방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홈바 Home Bar 선반에 보관되어 있는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테킬라 마오타이 같은 독주들이 전혀 줄어들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셔대던 젊은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불과 한 두해 전까지만 해도 술이라면 주종 불문하고 마다할 줄 모르던 나였는데 최근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회가 전반적으로 술을 많이 마시는 분위기이기도 하지만 체질적으로 비교적 술에 강한 편이어서 늘 술을 가까이하며 살아왔다. 특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인 기자로 일하던 시절엔 술이 삶의 일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술 마실 기회가 끊이질 않았고 그럴 때마다 습관처럼 폭음을 했었다. 술을 마시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았을 정도였다. 귀가시간은 거의 매일 자정 넘어 새벽이었다. 오죽하면 그런 나를 보다 못해 신혼 초에 아내가 가출까지 시도했을까.


어느 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있던 날 임신 중이던 아내는 여러차례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나의 잦은 음주에 대한 항의조로 가출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내가 나중에 알려준 코미디 같은 그날 밤 가출기는 이렇다. <밤늦은 시간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특정 목적지도 없이 무조건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를 향해 길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냉장고 문에 '나를 찾지 말아요'라는 메모지를 하나 붙여놓았다. 버스를 타고 명동에 내렸는데 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즐기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 보이는데 혼자만 불행하다고 느껴져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이미 자정이 넘었으니 남편이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붙여놓은 메모를 읽고 반성하고 있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냉장고에 눈이 가는 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냉장고 문에 붙여놓은 메모가 같은 자리에 그대로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직도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아내의 가출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아내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 메모지를 떼어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지금도 가끔 떠올리는 코미디 같은 아내의 가출 이야기이지만 젊은 시절 내가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가늠케 해주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나이 70을 넘기면서부터 건강문제로 걱정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큰 병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몸 여기저기에서 이상신호가 감지된다. 기력이 쇠해졌을 뿐 아니라 기억력도 피부로 느낄 만큼 떨어졌다. 의사를 만나는 빈도가 점차 늘어나고 이런저런 검사를 받는 횟수도 늘고 있다. 이런 모든 건강문제는 나이 탓이 크겠지만 젊은 시절 절제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술을 많이 마신 것도 한몫을 하는 듯하다. 이번에 아내 후배로부터 선물로 받은 헤네시 꼬냑도 다른 술들과 함께 홈 바 선반 위에서 화중지병 畵中之餠, 그림의 떡으로 남아있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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