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일상

by 잔르

자주든, 오랜만이든 나를 만나는 이들이 늘상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너 연애 안 해? 지금 만나는 사람 없어?"
"언제 연애해요? 궁금하다. 어떤 사람 만날지"

연애,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게 거짓말인 줄 알았으나 진짜였다. 별생각이 없었다. 하고 싶은 우선순위에 늘 연애는 빠져있었고, 누군가가 들어와 내 감정을 헤집어 놓기에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버거워했다.


"난 네가 연애 생각이 없는 줄 알았지"

오랫동안 나를 봐왔던 이가 해준말이었다. 누군가 나를 저렇게 보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사실 저마저도 관심 없는 내용이었다.


한날은 만난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다.

"제대로 된 연애는 하고 30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니?"
"지금도 너무 늦은 거 아냐?"


"글쎄, 30대의 내 목표는 다른 건데"


"다들 할 거 하면서 해. 시간 없어서 못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OOO도 결혼했잖아"

"난 OOO이 아니잖아"

"나도 연애하면서 공부도 하고 다 함"


그래그래, 대단해,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사랑이 많은 친구들이 내 친구들이라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게 전부였다.



연애,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서로를 좋아했으나, 사귀지는 않고 맘껏 표현하던 어린 날들.

그 친구는 반에서 인기가 많았다. 모든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그렇고 그런 애. 학예회 때는 반을 대표해 치어리딩 독무를 하던, 공부도 잘하고 음악도 잘했다. 그때의 나는 어떤 애인지 기억 안 나지만 이 친구와의 공통점은 악기를 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악기. 내가 하는 악기는 반주자가 필요했고, 나는 종종 이 친구 집에 가 연습을 했다. 그렇게 같이 무대에 오르는 것도 몇 번.

으레 학생이라면 챙기는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주고 싶었으나 꽉 찬 그 친구의 자리를 보고 돌아서면 내 자리도 어느새 그 친구의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이름과 자기 동생의 이름의 끝을 합하면 내 이름이 된다는 꽤나 가족적인(?) 고백을 받았고 얼마 있다가 전학을 간다는 얘기를 해줬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건 그 애와 그 애의 동생과 보낸 그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흘러 외국으로 나가는 날, 휴대폰*으로 모르는 번호가 찍혔다. 발신정지를 해놓은 나는 공항 한켠 공중전화로 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보았을 때부터 무조건 다시 걸고 싶었다. 몇 번의 수화음 끝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고, 예상하던 대로 그 애였다.

잘 지냈냐고 묻는 그 애의 질문에 대답보다는 이 번호를 어찌 알았는지가 궁금했다. 집 번호의 뒷자리를 외우고 있었고 중간 번호는 하나씩 네가 자주 쓰던 숫자를 맞춰봤다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눌렀는데 그게 맞았다고 했다. 그때의 그 말을 믿을 새도 없이 전화를 끊고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다시 보자 했지만 못 봤고, 우연히 들은 소식으로는 좋아하던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가 되었다고 들었다.


영화 같은 일 하나,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들,
좋아하는 줄 알았으나, 존경이었던 순간들.
을 지나 지금이 되었다.


그러나 근래 사랑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나고 보니 그랬다.

늘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정확히는 옥상에서 내려오는 이와, 입구에서 올라가는 이가 중간에서 만나는 일 같은 거란 얘기를 믿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가까워졌다.
자주 봤고, 자주 갔다.

꾸미고 온 날도,
후줄근 한 날도,
잠에 찌들어 있는 날도,
모두 봤다.


어느 날은 약속한 시간에 안 나오길래,
어제 못 자서 자나보다 하고 연락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의 집에 다다랐을 때, 연락을 했고 잠에서 깨지 않은 그는,
한참을 전화로 잠투정을 부렸다.


사촌 동생이 말을 배울 때쯤
함께 지냈었는데 늘 질문이 많았다.

"누나, 사랑이 뭐야?"

겨우 4살이 된 꼬맹이가 물어본 질문치고는 어려웠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귀여운 거, 귀여워 보이면 사랑이야"

귀엽다는 게 최고의 칭찬으로 알던 사촌 동생은 "그럼 누나는 나를 사랑하고, 엄마도 나를 사랑하네"라고 사라졌다.


근데 저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느 날 밤 우연히 본 그가 귀여워 보였다.

손도, 미소도, 하는 행동 모든 것이.
그때였을거다.
같이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

그 밖에도 여러 재밌고 멋진 순간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와,
몸의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그럼,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사실 서로의 공통점이 사라져,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연락이 점점 안 되고,
나는 그런 모습에 지쳐가고.


그렇게 말도 못 하고 꽤 긴 시간 속앓이를 했다.
그렇게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다정을 주고, 좋아하는 일은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고, 여행을 떠나는 어느 날.

백화점에서 받은 시향지가 그 사람이 좋아하던 향이었을 때, 그 사람과 자주 보던 곳을 오갔을 때, 그 사람이 잠결에 무심코 외친 토마토란 단어가 떠올라 책을 샀을 때, 그 책에 그 사람의 이름이 나왔을 때, 그 사람과 함께 먹고, 하고 싶은 게 떠올랐을 때, 같이 갔던 곳들을 지나갈 때, 그 사람과 나눠가진 모든 것들이 내 주변 곳곳에 흩뿌려져 있을 때.


이 모든 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어졌다.


그리고 그제야, 받아들여졌다.


"나, 꽤나 사랑했네."


이렇게 또,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는 게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리운 건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 그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래도 욕심을 내본다. 다시 만나 즐겁게 시간을 보낼 날들을.


* 이때 쓰던 휴대폰은 sky의 슬림팬더..

keyword
작가의 이전글팔월칠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