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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메이커 Feb 18. 2020

세계일주? 별 거 없어, 나도 했거든!

나는 누구인가?

  나 '이건'이라는 사람에 대해 약간의 배경지식이 있다면 앞으로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조금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TMI(Too much information, 과한 정보)지만 나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저 '평범하게' 친구들 사이에 있고 싶었다.


  새로운 도전과 시도가 두려웠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작고 사소한 언행에 쉽게 상처도 받았다. 내 생각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더 중요했으며, 매사에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이었다. 모두가 하면 나도 해야만 할거 같았고 제발 그렇게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이 밖에도 나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긍정적이거나 좋은 표현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들로...


  초등학교 시절 나 홀로 방에 있을 때면 '아, 힘들다, 다 싫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사는 걸까?, 왜 이렇게 약한 거야?'라는 생각이 낯설지 않던 나의 어린 시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술을 참 많이 좋아하셨던, 아니 술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으셨으며 지금은 조금 멀리 계시는 나의 아버지. 만 2~6세 유아기,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랐어야 했지만 우리 집을 제외하고 7 가정 이상의 친/외가 친척들 집에서 사랑 대신 눈칫밥을 먹으며 홀로 자랐던 아이. 짧게라도 적어보기에 너무나 길고, 평범하지 않은 그런 나의 성장 환경과 어린 시절.(차차 더 표현해볼 예정) 

그런 '이건'이라는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앞에서 언급했던 그런 수식어들로 내면이 가득 차있었고, 누군가 관심 가져주지 않으면 좋은 모습으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아이였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기에는 장난꾸러기였으며 참 밝은 아이였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들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좋지 않은 나의 내면의 모습들을 표현한다는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지 않은 거 같았다. 그래서 다름이 싫었고 더 이상 새로운 환경에 놓이기도 싫었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이야기들


  첫 번째로 나는 낯선 환경과 새로움이 두려운 아이 었다.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갔었는데, 당시 몇몇 친구들이 나를 괴롭히며 싸움을 걸어오기 시작했고 싸움도 못하면서 늘 그 2명을 동시에 상대했다. 이런 나를 조금은 더 강하고 남자답게 키우시려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 계셨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태권도 체육관에 등록을 했다. 자신감 없고 새로운 환경이 두렵기만 했던 아이는 재미있다고 흥미를 느끼기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징징대기 일쑤였다.

  "엄마, 나 운동 안 가고 싶어요, 사범님이 무서워요, 운동이 너무 힘들어요"

  그러나 그런 아이의 어머니는 지혜로우셨다. 

나에게 강요하지 않으셨고 그렇다고 내 의견을 바로 수용하시며 운동을 그만두게 하지도 않으셨다. 

그냥 공감해 주셨다.

   "건아, 많이 힘들지? 네가 힘들고 가기 싫으면 억지로 안 가도 괜찮아, 근데 엄마는 아들이 '딱 3개월만' 참고 다녀본 후에 결정했으면 좋겠는데. 만약 그 후에도 체육관에 운동하러 가기 싫으면, 그때는 정말 안 가도 괜찮아. 약속할게! 엄마가 지금 바로 관장님께 전화해서 말씀드릴게."

   어머니는 그렇게 침착하고 차분하게 나의 편에서 공감하시며 이야기를 해주셨었다. 그런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는 시간이 힘들었지만 꾹 참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 신기하게 아무 말 없이 체육관에 다니며 운동을 했었다. 흰 띠를 착용하고 체육관에 다닐 때는 왜 인지 모르게 창피해서 가방으로 가리기에 바빴고, 시간이 지나면서 태권도복에 메는 띠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빨간 띠를 착용할 때쯤부터 나는 시, 도 대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태권도라는 운동을 주변 친구들에 비해 꾀 일찍 시작한 편이었기에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도 형들이었고 나의 겨루기 상대 역시 형들이었다. 두려움 많고 자신감 없는 그 아이에게 친구들과 겨루기를 시켰어도 잘 못했을 것인데 형들과의 시합이라니...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다시 체육관에 안 가고 싶다고 징징거리기도 했었다. 

 

  하루는 과거 우리 체육관에 잠깐 계셨던 사범님이 다른 체육관으로 가셨었는데 그 사범님의 제자와 겨루기 시합을 하기 위해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긴장감 200%를 추가로 착용하며 기다리던 중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갑자기 관중석에서 "건아! 엄마 왔어, 긴장하지 말고 파이팅!"하고 웃으며 외치시는 어머니를 봤다. 힘이 나고 긴장이 완화되기는커녕 내 안의 긴장감은 더해져 300%가 되었다. 어머니의 방문과 응원으로 인한 격려보다는 정신이 멍 했다. 그때 상대편 선수의 사범님이 내 헤드기어(얼굴, 머리 보호장비)를 손으로 살짝 치시며 "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잘해라 건아! "하고 웃으며 격려를 해주셨다. 그 순간 내 안의 긴장감이 풍선 터지듯이 "펑"하고 터져버렸고 경기 시작 전부터 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우리 사범님도, 상대편 나의 옛 사범님도 무엇보다 바쁘신 가운데 처음으로 시합 응원을 하러 오신 어머니까지 모두가 당황스러워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참 귀엽다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하고, 주변에 나를 아는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네가 정말 그랬다고?" 할 거 같은 그런 일화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수시로 같이 운동하던 형들과 함께 시, 도 대회에 참여하였지만 자신 있게 경기에 임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아니 부끄럽지만 솔직히 단 한 번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내가 키도 더 크고 평소에는 발도 높게 올라갔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체육관을 벗어나 시합장에만 가면 왜 그렇게 얼음이 되어버렸었는지...

 

  두 번째로 나는 자신감이 없는 아이였다. 운동신경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눈에 띄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체력장이 있던 어느 날, 당시 600m 오래 달리기 1등, 멀리 던지기 3등 그리고 대부분의 측정 종목들이 10위 안에 들었다. "내가?" 감히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태어나서 1등이라는 것을 처음 해봤고, 과거 1등이던 친구도, 체육 담당 선생님도 무엇보다 나 자신도 너무 놀라고 신기했다. 그렇게 육상부에 들아가게 되었고 아침마다 한 시간 일찍 등교하여 800m 오래 달리기 종목으로 시 대회에 참여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체육과목을 담당하시던 담임선생님께서는 "건이 기록이 꽤 괜찮다, 이대로만 유지하면 시 대회에서 입상도(그리고 시 대표 선발) 문제없을 거 같다!"라는 격려를 해주셨다. 이전까지 나보다 잘 뛰던 친구 기홍이 역시 나에게 경쟁심을 느끼기보다 서로를 응원하며 아침마다 함께 연습을 했다. 

(글과는 맞지 않지만 갑자기 친구 기홍이가 보고 싶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다시 보고 싶은 친구다. 내 기억에 기홍이는 참 멋진 친구였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시 대회 아침이 밝았다. 당시 '이건'스럽게 긴장감 200%를 마음속에 가득 안고 육상 트랙이 있는 경기장으로 갔다. 체육중학교 진학 권유도 받았었고 학교에서는 페이스 유지도 잘했었다. 선생님으로부터는 당일 아침까지도 "건아, 평소처럼만 뛰면 좋은 기록으로 순위권 입상도 할 수 있겠다"라는 기대감을 받았었는데... 출발선에 서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심장이 "두근두근", 아니 그냥 "쿵쾅쿵쾅, 아... 너무 떨려'.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쿵쾅쿵쾅, 제발 가만히 좀 있어줘. 또 왜 이러는 거야."

  이렇게 나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경기장 안에는 출발 신호탄이 발사되었고, 선두로 뛰어 나가는 다른 학교 친구 뒤에 바짝 붙어서 300m 이상을 내 페이스가 아닌 그 친구 페이스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결국 페이스 조절 실패로 순위권 안에 들지는 못했다.

경기 후 선생님은 그런 나를 보고 놀라셨었다고 했다. 

  "건아! 나는 네가 오늘 아침에 무슨 좋은 약이라도 먹고 온 줄 알았다, 너의 페이스로 뛰다가 마지막에 전력 질주할 줄 알았는데 너답지 않게 처음부터 빨리 뛰어나가서 놀랐어(약간은 아쉬운 웃음)"

  그렇게 중간 정도의 등수로 시합을 마무리했던 거 같다. 평소 연습할 때의 내 실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등수였고, 무엇보다 그놈의 '긴장감'으로 인해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너무 아쉬웠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1등이라는 경험을 했고 더 좋은 기록과 결과를 기대하며 시 대회에 참여하였으나 평소 기량과 이렇게 다른 기록을 남기다니... 과거의 성취감은 온대 간데없었고 아쉬움을 넘어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고 못나보였다.



  세 번째로 나는 소위 말하는 볼 좀 차는(축구 좀 하는) 남자는 아니다. 초등학교 때 반 대항 축구 시합, 체육대회 등이 있을 때면 나는 대표선수가 되어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운동신경은 물론 축구를 잘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당연히 후보 선수였다. 그러나 꼭 주전 선수가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방법은 단 하나! 바로 골키퍼 포지션에서 축구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학창 시절 축구 포지션이 골키퍼로 정해지며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할 수 있었다.

(보통 초등학생들에게 골키퍼 포지션은 아무도 원치 않으며 흔히 말해 그냥 버리는 포지션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골키퍼 포지션 자체도 다른 친구와 '주전이냐 후보냐'를 경쟁하던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심이 생겼다. 이왕 골키퍼 하는 거 잘하고 싶었고 친구들에게도 잘한다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공을 멀리는커녕 앞으로 보내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주말마다 공을 가지고 혼자 벽이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 벽을 향해 1시간 때론 2시간 동안 공을 강하게 멀리 차는 연습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과 편하게 축구경기를 할 때면 나름 인정도 받던 실력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까지 교내에서 반별 시합이 있을 때면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놈의 '긴장감'으로 인해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할 때가 더 많았으며, 중요한 경기에서는 평소답지 않게 잦은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경기 후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많았다.



단지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건'이라는 아이 안에는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주 작게나마 이런 생각이 있었다. 

  "변하고 싶다, 이렇게 살기는 싫어. 제발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근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해서든지 그저 변하고 싶었다. 평범함, 나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던 그 단어. 단지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자신 있게 태권도 시합에 임했던 적이 없던 아이. 중학교 때부터 운동을 쉬다가 대학 ROTC 학군사관후보생 시절 다시 태권도를 했고 4단 심사, 겨루기 부분에서 시작과 동시에 나의 걸고 뒤차기 후 내려찍기 공격 기술로 상대가 보호기구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입에서 피가 났었다. 심사위원들이 다가와서 "너는 벌써 합격했으니 이제 발차기하지 말고 뒤로 무르기만 해라, 상대가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을 줘, 그래야 우리가 이 친구도 평가를 할 테니까."라는 말을 하셨었다. 시간이 지나 전역 직전 몸이 많이 굳었지만 이번에는 5단 심사, 긴장감 따위는 거의 없이 자신 있게 겨루기에 임하였고 승단심사에 합격을 하였다. 몇 달 후 전국 대학별 태권도학 전공생과 선수 출신들 사이에서 사범 연수까지 잘 마쳤다. 

과거 형들과의 겨루기 시합에서 시작도 하기 전에 긴장감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리던 아이는 어느덧, 그런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어른이 되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낯선 환경 속에서 두려움과 맞설 때마다 그것을 이기려는 생각은커녕 그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버티고 싶었지만, 늘 져버리는 그 아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과거로 돌아가서 그 아이를 만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너는 용기를 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더 잘하려고, 억지로 버티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처럼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멋있고 대단해."


  시 육상대회에서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평소 실력과 관계없이 앞서 나가는 다른 학교 친구를 생각 없이 무작정 따라 뛰던 아이. 그때의 경험 덕분에 나는 오래 달리기를 할 경우 무조건 내 페이스로 뛰며, 남들이 아무리 빨리 뛰어도 내 페이스로 뛰면서 마지막에 역전을 한다. 대학시절 ROTC 지원 체력시험에서 1.5km를 전체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이후 입영훈련을 하는 동안 전국 각 대학에 있는 동기들과 함께 3km 체력측정 시 200여 명이 뛰어도 매번 90% 이상은 1등을 하였다. 초등학교 때의 그 긴장감을 이겨냈고 이제는 다른 이들의 페이스가 아닌 내 페이스로 뛰기 시작했더니 이런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건아, 앞으로도 너의 페이스로 살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너만의 인생 경기장을 달려봐!"


  초, 중,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우리 반 대표 골키퍼였으며, 처음에는 축구를 못해서 골키퍼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골키퍼 포지션을 잘 소화하기 시작했다. 계속된 개인 연습으로 인해 막는 것도 잘했고, 공을 차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잘했다. 그리고 필드에서 뛰는 친구들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위치 선정에 대해 지시도 하였다. 노력의 결과였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을 내가 이렇게 경험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즈음부터는 친구들과 축구경기를 할 때 수비, 미드필더, 윙어, 공격 등 내가 뛰고 싶은 포지션을 다 경험해 봤다. 축구를 아는 사람들은 이해가 조금 더 쉬울 텐데, 최후방 골키퍼의 위치에서 축구를 해본 사람이 경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영향 때문일까, 대학교에 입학했고 학과, 동아리 등에서 선배들과 함께 축구를 할 때부터 군 생활 시절까지 나는 늘 주전이었다. 그것도 골키퍼가 아닌 필드에서 말이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시작해서 공격형 미드필더와 윙어 그리고 골을 넣는 센터 포워드까지 웬만한 포지션은 어느 정도 다 소화가 가능했다. 군 생활 시절에는 간혹 몇몇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도 들었었다. 


"너 어릴 때 잠깐 선수 생활했었어?"


  축구라는 운동을 해본 적도 없었고 아예 할 줄도 몰랐으며 그저 친구들과 운동장 안에서 같이 어울리고 싶었던 어리바리한 아이. 그러다가 축구를 잘하고 싶었고, 이왕 하는 거 잘하는 것을 넘어 경기에서 이기고 싶었다. 이런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승부욕으로부터 시작된 작지만 꾸준했던 노력. 나 같은 이런 사람도 노력하고 또 노력했을 때 이렇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지금은 선수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있는 사회 여러 공동체, 학교, 동아리 등 어느 단체든 소속되게 된다면 가장 잘하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베스트 11명의 선수가 되어 파이팅 넘치게 축구를 즐길 자신은 있다. 

당연히 내 생각이다.(웃음)



  이 밖에 나라는 사람에 대해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다. 

  '과거에는 이랬지만 지금은 이렇다'하며 '나 잘났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니 조금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거의 없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힘과 용기를 줄 수 있기를 소원한다. 무엇보다 좋은 자극과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다. 겨우 몇 문단에 걸친 나의 짧은 이야기지만 아직 꺼내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 기회가 되면 하나하나 천천히 꺼내고 싶다. 


  이제 나는 낯선 환경 속에서 모험과 도전을 즐길 줄 알며, 평범함 또는 같음보다는 '다름'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만약 하늘에 있는 신께서 "어린 시절 네가 원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게 해 줄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니요, 지금이 좋아요, 정말 좋아요. 계속 이렇게 살고 싶어요. 감사해요." 


  잘 살고 못 살고의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저 조금은 다르게 살고 싶다. 그렇게 '나답게' 말이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나 같은 사람도 해냈어요! 그러니 당신도 할 수 있어요!"








누군가의 인생에 '울림'을 주는 삶을 꿈꿉니다.

916일 동안 80개 나라를 방황하였고, 조금 다른 인생을 나만의 페이스로 살아가는 중.


- 개인 키워드 : 울림, 가족, 약자, 자신감, 리더십, 영향력, 강점, 세계일주, 퇴사, 도전, 성취, 강연, 동기부여, 공감, 글, 코칭, 관계,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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