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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선택하는 사람

by 건우

스무 살이 된 너희가 살아갈 세상은 어떨까? 나는 지금보다 더 각박할 거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그놈의 핸드폰. 핸드폰 때문에 너희가 덜 친한 것 같다. 같이 놀아도 모자랄 시간에 네모난 불빛에 눈이 팔려 있으니까. 여름철에 봐왔던 가로등 아래처럼. 그래서 옆에 앉아 있는 친구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난 아이들이 핸드폰 없이도 너무나 잘 지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점심시간, 부대찌개를 맛있게 먹고 교실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분주하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각자의 재미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복도 건너 작은 놀이 공간에는 땀냄새가 코를 찌른다. 남학생들은 직접 만든 ‘스틱 가가볼*’이라는 놀이를 하고 있다. ‘스틱 가가볼’은 블록으로 만든 스틱으로 작은 블록 하나를 공으로 삼아 상대방을 맞혀 아웃시키는 놀이다. 2주에 한 번씩 교실에서 정식 가가볼을 하는데, 한참 기다려야 하니 비슷한 놀이를 하나 만들었나 보다. 바깥만큼 교실 안도 붐빈다. 손바닥을 중앙에 모으고 있는 여섯. 주사위를 던져 운을 시험하고 있는 둘. 설산을 정복하고 있는 셋. 온갖 보드게임이 난무했다. 그 사이에서 시선을 빼앗는 목소리가 들렸다.


“현지야..! 현지야 일어나..!!”

”...여기가 어디지?”


아무래도 사고로 기억을 잃었나 보다. 지난번에는 길을 건너다가 자동차에 치였는데. 걱정 마셔라. 둘은 연기 연습 중이니까. 근데 꼭 사고가 난다. 그래서 기억을 잃는다. 아니면 누군가 죽어서 슬퍼하거나. 코인노래방에서 본 발라드 뮤직비디오가 생각난다. 한 번은 연기하는 장면과 어울리는 BGM을 깔아준 적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노랫소리에 날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연기에 집중하더라. 약간 처진 눈 안에 금방 울어버릴 것만 같은 글썽임. 나는 안 본 척하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저번에는 수학 시간에 길게 뽑아놓은 줄자를 바닥에 둔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지민이를 비롯한 여학생 3명이 줄자를 가운데에 두고 열심히 걷고 있었다. 줄 넘어 왼발을 오른쪽으로, 줄 넘어 오른발을 왼쪽으로. 너무 벌린 탓에 다리는 위태로웠지만 허리에 얹힌 두 손은 정말 당당했다. 그렇게 칠판까지 나오더니 포즈를 취한다. 브이. 그때도 나는 노래를 틀었다. 강하고 쇠맛 가득한 런웨이 음악. 지민이는 노래에 맞춰 걸음을 뗐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잘 자라고 있다. 그런 것만 같다.


'안타깝게도 교실에서 가르치는 일은 고립된 섬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하다.'

(애덤 프랭크. 질서 있는 교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문화멀티미디어. p.185)


최근에 읽은 문장이다. 교사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질문. ‘나는 잘 가르치고 있는가?’ 아무도 대답해주질 않으니 다들 스스로 자책하고 만다. 그리고 이 질문은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가?’로 이어진다. 이 또한 그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하윤이가 우유를 안 마시고 마신 척 우유통에 집어넣었을 때, 유진이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마음이 심상치 않았다. 어느 날 승한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을 때는 지난 내 모습이 떠올라 시간이 멈추더라. 이내 내 마음은 무너졌다. 잘 지내고 있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건만. 작은 돌 하나 얹었을 뿐인데 시소가 확 기울었다.


선생님이란 뭘까. 선생님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작은 믿음을 선택해 가는 사람이다. 내일은 우유를 다 먹을 거라고. 이제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을 거라고. 지금 잘 자라고 있는 거라고. 스무 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따뜻할 거라고. 교실에서 했던 것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거라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그 식상한 문장도 믿는다. 고작 그 한 줄이 너희 몸으로 들어간다면 얘기가 달라질 테니까. 작고 소중한 이 믿음들은 시간이 지나 문자메시지로, 빼빼로로 때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돌아오더라. 시간이 더 지나면 또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우리 반 마지막 규칙. ‘틀려도 괜찮아요!’ 바람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아이들이 무엇이든 해봤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선생님을 잘 해내야 하겠다. 비록 가늘지만 24개로 겹쳐진 그 믿음은 오늘도 교실을 지켜낸다. 내가 선택하는 한 이곳은 놀이터이자 세트장이고 운동장이자 런웨이다.



*가가볼: 일종의 피구. 모든 책상을 눕혀서 큰 사각형 경기장을 만든다. 경기장 안에서 공을 쳐서 상대방을 맞히는 경기. 상대가 친 공을 맞거나 경기장 벽에 부딪혀 나온 공에 맞으면 아웃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승자가 된다. 초등학생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피구지만 교실 안에서는 피구를 하기 어렵다. 공을 잘못 던졌다간 교실이 난장판이 되기 때문. 그래서 교실 안에서는 보통 가가볼을 선호한다.


(이 글에 나오는 모든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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