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교시 수업을 마치기 5분 전, 나는 너그러운 선생님이 된다. 우리 반은 보통 마지막 교시가 끝나기 15분 전부터 알림장을 쓴다. 알림장을 다 적은 학생은 나에게 와서 검사를 받는다. 그리고 검사를 받은 학생은 서랍과 사물함을 정리한다. 하지만 때때론 수업하다가 알림장을 적을 시각을 넘길 때가 있다. 시계를 보니 종 치기 5분 전. 방과후수업과 학원 스케줄이 있는 이 바쁜 학생들을 교실에 계속 데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알림장에 날짜와 요일이 안 적혀 있어도 통과. 알림장에 지렁이가 가득해도 통과. 어떤 날은 알림장을 통과. 안 쓰고 넘어간다. 보너스로 숙제까지 없어질 때면 아이들은 환호성을 메기고 받는다.
하지만 절대 너그럽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 그 누구보다 깐깐해야 한다. 이 깐깐함의 척도야말로 아이를 춤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연필을 바르게 잡지 않고 글씨를 일명 휘갈기던 연수가 바른 글씨로 일기를 써왔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글씨가 예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에? 뭐야. 연수야. 이거 니 글씨야? 대박. 아니, 이렇게 쓸 수 있네? 엄청 바르게 썼네! (일기장을 8장 앞으로 넘기며)이때랑 지금이랑 너가 봐도 완전 다르지. 언제가 더 예뻐. 그치. 어제 쓴 게 훨-씬 예쁘지. 이야. 아니 ‘바’ 글자 이거 모양이랑 딱 맞네. 연필 바르게 잡는 거 이제 좀 익숙해졌나보다. 자리 잡았네. (오른손을 내밀며)하이파이브. (짝) 쌤 오늘 글씨 딱 봤다. 잘했어!”
평소 일기를 한 장 정도 써오던 혁규가 여행을 다녀와서 일기를 4장 써왔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혁규는 아침부터 나에게 와서 자신이 일기를 4장 썼다는 걸 2번이나 말했다. 그러니 일기를 많이 썼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혼낼 것처럼 담담하게)혁규~ 이리 와보세요. 혁규야. (엄마가 쓰라고 안 했을 테지만)엄마가 4장 쓰라고 했어? 에? 그럼 너가 스스로 쓴 거야? 적다 보니까? 대박. 얼마나 걸렸어? 우와! 그럼 그 시간 동안 집중해서 글쓰기 한 거네? (오른손을 내밀며)하이파이브. (짝) (안 힘들다고 말할 걸 알지만)안 힘들었어? 4장은 진짜 대단한 건데. 3학년도 이렇게 못 쓸걸? 약간 5학년이나 6학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반 아이들을 바라보며)얘들아 이거 봐봐. (일기장을 들고 해당 쪽수를 펄럭이며)혁규 일기 4장이나 썼다? (아이들 환호 소리)
칭찬할 때는 진짜 깐깐해야 한다. 하지만 웬만한 상황에서 교사는 너그러울 때가 좋다. 특히 아이가 잘못했을 때에는 더 그렇다. 행동에 대한 결과는 책임질 수 있도록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너그러워야 한다. 말이 쉽다. 말이 쉬워서 나는 말만 한다. 그날도 말만 쉬웠다.
우유 1개, 빈 우유갑 4개 그리고 번호 집게* 5개. 또 누군가 우유를 안 먹고 우유 통에 넣었다. 나는 범인을 찾아야겠다며 집게에 쓰여 있는 번호를 큰 소리로 불렀다. 아이들 다섯 명이 나에게로 왔다. 우유를 안 먹고 놔둔 사람이 누군지 물어봤다. 혼내지 않을 테니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말했다. 유진이도 먹었다며 말했다. 그러더니 유진이가 손에 든 일기를 가지고 무리에서 나가려고 했다. 일기를 나눠줘야 한다며. 이때부터였다. 내가 유진이를 의심한 것이.
종례 때문에 아이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종례가 끝난 후 아이들을 다시 불렀다. 나는 변변하지 못한 수사를 시작했다. 우진이는 내가 다 마신 우유갑을 봤다. 우진이 제외. 준우는 좀 전에 우유를 씻어서 뒀다고 하고, 우민이가 그걸 봤다고 했다. 준우 제외. 이제 진우와 우민이와 유진이만 남았다. 다들 언제 우유를 먹었냐고 물어봤다. 진우와 우민이는 곧잘 대답했다. 유진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2교시 끝나고 먹었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2교시 끝나고는 유진이가 내 옆에서 받아쓰기 숙제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했더니 2교시가 아니라 3교시에 받아쓰기를 한다고 가위바위보하고 나서 마셨다고 말했다. 더 의심이 갔다. 그렇게 나는 유진이를 확정 지어 버렸다.
진우와 우민이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유진이와 단둘이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진짜로 우유 마셨냐고. 안 마셨어도 혼내지 않겠다고. 유진이는 작은 목소리로 그리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계속 만지며 마셨다고 말했다. 당당해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 멈춰야 했는데. 나는 유진이에게 계속 말을 했다. 솔직하게 말하라고. 거짓말하지 말자고. 하지만 유진이는 또 우유를 마셨다고 이야기했고,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더는 진전이 없을 것 같아 유진이에게 가라고 말했다. 유진이가 뒤로 돌아서는 그때. 나는 유진이의 표정을 발견했다. 곧 울어버릴 것만 같은 눈. 문으로 걸어가는 축 처진 어깨. 담임선생님의 의심이 가방 안에 한가득이니 처질 수밖에. 그 와중에도 나는 복도에 있는 유진이 짝꿍을 불러서 유진이가 우유를 마시는 걸 봤는지 물어봤다.
유진이가 실내화를 들고 중앙현관으로 나갈 때쯤, 나는 점점 마음이 불편했다. 불안했다. 내가 실수했구나. 금요일을 이렇게 보내면 너도 나도 주말이 무너지겠구나. 나는 부랴부랴 중앙현관으로 빨리 걸어갔다. 혹시 유진이가 있을까 싶어서. 가고도 남을 시간이라 정말 실낱같은 희망만 존재했다. 중앙현관을 나갔다. 정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회대로 갔다. 누군가 앉아 있었다. 유진이가 앉아 있었다. 나는 영어 숙제를 하는 유진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다 알면서 뭐 하는지 물었다. 영어 숙제를 안 해서 하고 있단다. 몇 시까지 학원에 가야 하냐니까 정해진 시각은 없다고 했다. 유진이가 숙제에 별표를 친다. 내가 영어를 읽어주고 한글로 알려주었다. 곧잘 적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그렇게 나는 사과할 준비를 반복했다. 다른 어떤 관심도 사과가 될 수는 없다.
“유진아, 아까 선생님이 의심해서 속상했지?”
“네. 근데 생각해 보니까 그럴 만했어요. 제가 기억이 안 났잖아요.”
“선생님 사과하려고 너한테 온 거야. 유진아, 우유 안 마셨다고 의심해서 미안해.”
“네. 괜찮아요~”
그리고 나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너가 하는 약속 아니고 내가 하는 약속이야. 선생님 이제 의심 안 할게. 약속”
두 검지를 걸고, 두 엄지를 마주 댔다. 그러고 진짜 인사를 했다.
위태롭다. 내 말과 내 행동. 우유 안 먹는 게 뭐라고 사람을 의심했나. 내가 뭐라고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 올라갔나. 섣부른 의심이 부른 처참한 광경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너그러운 게 좋다가 아니라 너그러워야만 한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다짐밖에 없어서 나는 다시 한번 너그럽기로 다짐한다.
*번호 집게: 흔한 서류 집게. 거기에 매직으로 번호가 쓰여있다. 우유를 먹은 아이와 안 먹은 아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집게를 꽂아 놓는다. 돈을 주고 먹는 급식이기 때문에 현황을 꼭 파악한다. 남으면 처치가 곤란하기도 한다. 우유에 글씨를 쓰면 물기 때문에 안 적히기 때문에 집게를 사용한다. 어떤 반은 25칸 정리함에 우유를 번호에 맞게 꽂아두기도 한다.
(이 글에 나오는 모든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