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나를 포기해주시길.
12월은 가난한 연인들에게 가혹하다. 크리스마스니 연말이니 하며 대단한 것들을 선물하고 경험해야 하는 것처럼 구니까. 그런 몽글한 기대감에 핀 건 즐거움이 아닌 걱정일테지. 어찌하면 내 사랑이 값싸지 않게 보일까 하는 고민일테고. 호캉스니 백화점 빅 세일이니 세상에서 떠들어대던 어느 목요일 저녁, 나는 화가 가득 나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남자친구가 새해에 나와 함께하는 대신 집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직장 상사가 연말이 되기 전에 병가 일수를 잘 아껴 쓰라고 열다섯 번째 말해서인지, 피곤할만큼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해 달라던 무수한 연락들이 연애한다는 말 한마디에 코빼기도 비칠 기색이 없어서인지. 그 모두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열이 차올라서 가슴이 아픈 사유에 저것들은 빠져있을 게 분명했다. 남자친구에게 잡도리를 해도, 직장 상사에게 대들고 그만 좀 하시라고 말해도, 나 없을 크리스마스 파티는 어차피 재미없을 거라고 저주를 걸어도 시원해지질 않았으니.
연말연초병 혹은 기간제 우울증. 내가 붙인 이름은 이것이다. 얼마나 길진 모르겠지만, 아마 꽃이 피어 산책을 하고 싶어지는 봄이 오면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슬픔. 세상이 가진 것들을 내어놓고 반짝이는 전구로 칠갑을 할수록, 나는 초라해져만 갔다. ‘2024 연말결산’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유튜브들이 올라왔다. 내가 선택하지 않아 가지 않았던 길들이 다채로운 영상으로 수백 개씩 쏟아졌다. 하나씩 재생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 빗금을 하나 더 그었다. 삐빅, 이번 삶은, 이번에도 틀린 거라고. 무수히 그어진 빗금들로 가장 평범하고 이룬 것 없이 볼품없는 게- 올 해 내 시간들이라고.
그러니 가득찬 화는 결국 나를 향한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상담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은 당신을 위한 결심을 하고 실천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큰 불만 없는 현재를 다가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며 아파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런 따스한 말은 응급 밴드밖에는 되질 않았다. 매일 저녁을 먹으며 하나씩 후회할 것을 씹어 삼켰다. 오늘의 주가를 1년째 눈으로 쳐다만 보지 말고 남들이 사지 말라고 했어도 그냥 삼성전자 주식을 사 뒀어야 했다, 이렇게 갑자기 반등할 줄 알았다면. 하늘에서 뚝 돈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로또를 매 주 샀어야 했다, 어차피 커피값으로 날려버릴 오천 원 까짓 거. 멋진 곳에서 출판할 거라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되는 대로 독립 출판이라도 했었어야 했다, 이렇게 글 쓰는 것에 무용함과 허탈함을 느낄 거라면 뭐라도 손에 쥐었어야지.
니기럴, 잡스러운, 무엇 하나 잡지 못하고 놓지는 더더욱 못하는 나 같으니라고.
나는 결국 오늘에 안주했던 2024년을 꼭 안고 슬픔의 강으로 뛰어내렸다. 거기서 발버둥칠 생각도 않고. 밥이 소화되지 않아 명치를 꾹꾹 주먹으로 쳐 댔다. 갑자기 날갯죽지와 척추 사이의 그 어딘가 경련이 일어나 찌릿한 등을 모른체하고 편의점으로 걸었다. 그렇게 불행 중독이 되어 소파에 누워 명품 하울 릴스나 돌려보던 내게 무작위로 알고리즘이 노래 하나를 추천해줬다. 무심코 듣던 노래의 가사가 갑자기 나를 훅 때렸다. 페퍼톤스의 give up, 15초 짧은 동영상 안의 글귀. [절망이여 나를 포기하여라.]
다른 가사는 들어오지 않더라고. 처음부터 노래를 다 들어보았는데, 딱 저 말만 내 마음속에 들어오더라고. [절망이, 나를, 포기하라고? 내가, 절망에, 휩싸인 게 아니고?] 가사는 곧장 내게 번역되어 박혔고, 나는 화에게서 풀려날 실마리를 찾았다. 나의 2024년은 절대로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 누구보다 노력했으니 남의 연말 결산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그건 바로
[슬픔이 이제는 나를 온전히 포기해줬으면 좋겠다.]
나만 슬픈 줄 알았다. 그러니 내가 가진 아픔과 고통은 모두 내 것이고, 내가 아니면 겪지 않을 ‘선택적’ 감정이었다. 내가 나로 태어나 재수 없게 걸린 통증. 내 화는 거기서 비롯된 거였다.
너, 왜, 너로, 태어나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런데 절망이여 나를 포기하라니. 내가 나를 포기하는 대신, 절망에게 날 포기하라고 소리치는 대장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막 저 끝에서 내게 생을 포기하라고 모래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그들의 이름. 우울증, 직장, 주가, 로또, 인스타, 출판사, 친한 줄 알았던 지인들. 나는 그러나 그 앞에서 소리친다. “나를 완전히 포기해! 이제 그만 하라고! 소용 없단 말야!”
나는 올 한 해 슬픔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슬픔에게서 부단히 도망치려고 노력했다. 가만히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맞서 싸우겠다고, 어느 날은 온 몸으로 받아들여 보겠다며 수없는 전투를 치러왔다. 그렇게 나는 나를 지켜냈다. 맞다. 나는 나를 나대로 지켜내고자 온갖 발버둥을 쳐댔다. 그러니 내 1년은 누구보다 엄청났을 365일이었음을. 아무리 스스로에게 박한 나임에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슬픔에게서 승리했다.
어차피 태어났으니 칼 한 번은 휘두르고 살 거라고.
생일이었다. 1월 5일. 연초에 생일이 있는 사람은 1월 1일과 맞물려 탄생을 다시 한 번 고심하게 된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이 힘든 겨울에 나를 낳아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더라고. 나는, 태어난 게, 사는 게, 하나도 고맙질 않으니까. 막내딸이 잠잠하니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부모님이 결국 저녁에 전화를 걸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 대신, 물었다.
“밥은 먹은 거냐? 맛있는 걸 먹어야 하는데. 그걸로 되겠냐.”
나는 대답했다. 생일 축하해줘서 고맙다고.
여전히 나는 포기해 달라고 빌어야 할 것들이 많다.
제발 내게서 떨어져달라고, 신발 끈이 풀어진 채로 지하철에 타는 사람처럼 무던하게 살고 싶다고. 협조 공문을 보내야 할 것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슬픔부터 시작해서 저 뒤의 절망까지. 걔네들은 파렴치없게도 반려 버튼을 꾹 눌러대겠지. 하, 진짜 생각만 해도 열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신발끈이 풀어지고는 밖에 못 나가는 내가 리본 모양새로 두 번씩 묶어본다. 새로운 해는 또다시 시작되고 나는 내 성질머리를 못 이겨서 머리를 몇 번이고 염색에 파마까지 온갖 난리를 치겠지만 그래도. 또 다시, 뭘 해도 예쁜 내가 삶을 참아보기로 한다.
다 비켜라, 이것들아. 내가 간다. 2025년에도!
꿋꿋이 재협조 공문을 들고 너네들을 다 무찌르러.
그러니까, 올 해 내 목표부터, 다시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서 적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