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성과도 자격지심도 인생 부분 설치 기사일 뿐인 걸!

슬픔이 이만 날 포기했으면 좋겠다 3화

by 라화랑
나는 그냥 살아냈는데, 여느 경력직 인생이 되어버린 30살 여자가 나란 말인지. 내가 원하는 나와 되어버린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르고,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그래서 안락한지.

얼마만큼 오늘에 만족하고, 또 얼만치 앞을 향해 날 다그쳐야 할까. 균형 잡힌 식사도 미쳐가는 물가 앞에 패배,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숨차게 운동하겠다는 다짐도 퇴근 후 소파 없어 누워버린 침대 위에서 녹아버리고, 그렇다고 독기 품고 나를 더 발전시킬 힘은 쌓인 빨래와 더러운 그릇에 소진되는 요즈음.

스스로 평가질하는 그놈의 ‘성과’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는 건 쉽지 않다.
제목을-입력해주세요_-001 (5).png


거품 목욕을 했다. 자취방을 큰 돈 주고 바꾸면서 얻어낸 욕조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안 쓰면, 전세자금을 괜히 날리는 것만 같다. 팔자에도 없을 고급진 반신욕이라는 취미를 들여보고 싶어 산 액체형 거품 목욕제, 이상하게 거품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을 반 값으로 싸게 사서 효능이 떨어진 건가- 의심하기만 했다. 내가 너무 적게 넣었나 싶어 더 붓다 보니 7번 정도 사용 가능했던 양은 3번만에 똑 떨어졌고, 아주 약간이 남았을 때 나는 드디어 작은 글씨로 쓰여진 ‘How to use’를 볼 생각을 해 냈다. 거기에는 친절하게 쓰여져 있기를- [이 제품을 먼저 넣고 강한 수압으로 욕조에 물을 받아 사용하시라]더라.



그렇게 처음으로 2000년대 드라마 장면처럼 풍성한 거품들이 따끈한 물 위에 살포시 얹어졌고, 나는 재벌 남자주인공을 만나 처음으로 욕조라는 데에 앉아본 가난하지만 당찬 여자주인공처럼 신이 나 몸을 담궜다. 맥주도 하나 깔까, 고민하며 화장실 앞에 스피커를 두고 클래식 노래를 틀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 같기도 하단 말이지.’

약간의 뿌듯함이 밀려왔다 사라진 건 단 10분 만이었다. 답답했다. 다리를 쭉 펼 수 없어 굽히면 무릎이 차갑고, 다리를 다 펴면 어깨 위가 추웠다.

‘더 큰 욕조가 놓여진 넓은 집이라면 나는 오늘이 더 행복했을 거야.’

생각하고 보니 갑자기 화장실 물때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탁실도 없어 고개를 휙 돌리면 세탁기 문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초라한 인생 같으니라고. 식어가는 물에 몸을 더 담그기 싫어 흘려보내버렸다. 한 번에 사라지지 않는 거품들을 정리하는 것도 꽤 귀찮았다. 샤워로 몸을 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기분은 노곤하니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죄책감이 딸려온다. 이건 뭘까. 나는 거품들 사이를 휘젓고 깊고, 더 깊은 물 안으로 잠수했다.

KakaoTalk_20250403_213131716.jpg


‘결과물, 1등, 최고, 성과.’ 내 물질에 걸린 전복들은 이거였다.

오늘이 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 얻은 결과물이 아닌 것만 같다. 지금까지 얻은 것들이 뭐 별거라고, 그걸 뭐 자랑스럽다고 스스로 발전시키는 데 하루를 쓰지 않고 있느냐고. 그렇다고 나는 쉰 오늘이 기억에 남을 만큼 행복하지도 않았다고. 그러니 오늘 하루를 허투루 쓴 거라는 결말.


말도 안 되는 걸 안다. 알지만, 동화속 공주님처럼 그놈의 ‘긍정적으로’ 털어내고 시련따위 툭툭 털기 참 쉽지 않다. 처음부터 공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나는 무엇으로 태어난 걸까. 시녀, 혹은 공주가 먹다 버린 홍차 찌꺼기?


KakaoTalk_20250403_213648038.jpg


모든 종류의 자격지심은 매일 나를 갉아먹는다. 여전히 나보다 잘난 어떤점을 찾아 끊임없이 남을 질투하고, 내 처지를 비관한다. 승리자는 없고, 패배자만 가득한 나의 세상. 나는 내 세상 안경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빠져나올 방법을 몰라 버둥거린다. 승리 따위는 없다고, 우리 모두는 각자 아름답다고 외치는 저 외국 유튜브 숏츠들을 다 머리채를 잡고 뒤흔들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성공’의 잣대, ‘아름다움’의 잣대는 정해져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준에서 한참 떨어진’ 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상담 선생님께는 불안에 표류하는 중이라 고했다. 그 어두움에 깊이 잠식당하지 않으면서 그 위에 동동 떠 있는 나를 보고 의외로 ‘그렇게 계속 좀 더 있어도 될 것 같다.’고 말씀하시길래 이유를 물었다. 명쾌한 목소리로 나를 보며 입을 여시기를.

“더 있다 보면 뭐라도 할 거니까요. 그러니 아직 좀 더 있어도 돼요. 충분히 느껴 봐요.”



하긴,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면 내가 고타마 싯타르타가 되었겠지. 혹은 니체라던가. 머리를 굴려봤자 나올 수 없는, ‘내가 나라서 오는 불편감’을 나는 그냥 꿀꺽 삼키기로 했다. 소화불량인 채로. [내가 나를 인정해 주면 된다.]는 신성한 결말따위 나는 절대로 내지 않을 테라고 다짐하면서. 어떻게든 나를 만족시킬 나만의 결과물을 내 보일 거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남들한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이 마음까지 내가 억지로 죽일 수는 없는 거라고.



처음으로 에어컨을 직접 사야 하는 자취방에 살게 되어, 설치 기사님과 약속을 잡았다. 퇴근하고 부리나케 집에 도착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시간이라, 나는 업무를 얼마나 어떻게 처리할지 출근하면서부터 머릿속에 알찬 계획을 짜고 몇 번이고 수정했다. 그럼 이상하게도 직장은 유달리 바쁜 하루를 선물해 준다. 결국 정시 퇴근을 성공해내고, 집에 도착해 기사님과 조우했을 때 나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기사님의 이 말 한 마디 때문.

“이거 어느 벽에 설치할까요?”


KakaoTalk_20250403_213116735.jpg

아뿔싸. 시간 안에 맞추어 모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한다는 일념 하에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에어컨 기사님을 만나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 말이다. ‘설치’.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설치 장소’였음을. 모두에게 인정받는 좋은 자리를 찾으려면 2박 3일 정도를 고민했어야 했는데, 인터넷도 찾아보고 아빠에게 물어보기도 했어야 했는데. 나는 손톱을 까드득 까먹으며 기사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골라달라 얼버무려 버렸다. 낭패감이 몰려왔다. 이렇게 급박하게 무언가를 결정한 적은 근래 들어 처음인지라. 세 다리 정도 돌다리를 두드려 보지 못한 채 덜렁 벽 위에 달려진 에어컨이 나는 그렇게도 불안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는가.’



중요한 것을 깜빡하고 나는 눈 앞의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 심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설치 후 아빠와 남자친구, 두 사람에게 잘 했다는 칭찬을 나는 기어코 들어야만 했고, 그들에게 칭찬을 착즙한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나의 오늘을 향한 완벽하지 못한 행복감도, 최고의 노력으로 맞이한 지금의 내가 맞는지 의심하는 마음도 모두 결국 ‘나의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걸. 뭘 위해서 그렇게도 1등에 목말랐는지, 성공에 집착했는지 자꾸 나는 까먹고 만다. 결국 에어컨을 우리 집에 다는 게 목표였으면서- 에어컨 기사님을 시간 내에 만나기 위한 계획이나 휘황찬란하게 짜고 뿌듯해하는 내가 웃겼다. 그저 나는 여름을 상쾌하게 보내고 싶었던 것 뿐인데 말이지. 그러다가 결국 눈 앞에 가장 중요한 걸 놓쳐버리고 만다. 남들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웃더라고. ‘얼마나 바빴으면 에어컨 기사님을 부르면서 어디에 설치할지 생각도 않냐’면서. 그러게, 네 말이 맞다고 같이 웃었다.



인생을 바쁘게 살면서도 나는 그러니- 내 삶이 어디로 갈지 고민도 하겠지만, 결국은 가는 길이건 갔다가 되돌아올 길이건 부디 잊지 말자고.
태어난 김에 사는 이유를.
나 하나 행복해 보겠다고 온 지랄 힘을 다 하는 중이라는 걸.


keyword
이전 02화이사유감- 2년마다 원룸 바꾼 썰, 삼천보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