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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 엄마를 평범한 아줌마로 만들어 놓았을까

슬픔이 이만 날 포기했으면 좋겠다 4화

by 라화랑
오늘도 듣고야 말았다.
“으응, 그러니까 혹시 공부할 생각 없어? 다시?”


발신지는 엄마. 수신지는 30살이 된 여자, 나. 어머니, 직장 8년차 서른살 여자에게 무슨 공부를 시키시려는 겁니까. 부모님의 기대를 안고 살았던 지난 10년, 전교 1등을 도맡던 막내딸이 실망스럽게도 본인과 같은 직업을 선택했을 때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다 해도 엄마만큼은 닮지 말아라.’라는 그 말이 오히려 나에게 반항기가 섞여 꼭 그러고 말리라는 삶의 복선으로 자리잡았음을 알았을까. 뭐, 슬슬 마지막 기대를 아파트 청약통장처럼 신청 걸어놓는 엄마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마의 서른이다. 친구들이 결혼을, 혹은 비혼을 선택하고 주변 사람들은 저축 혹은 투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연애와 업무, 또는 취미생활 중 택일하여 열을 올리는 묘한 나이. 서른은 주어진 길이 없어진 어른들이 헤메이기 딱 좋은, 제 2차 사춘기 집합소이다. 이제 아무도 내 삶에 간섭하질 않아. 내 삶을 어떻게 살라고 아줌마들의 푸념 섞인 잔소리가 다양화되는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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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자유롭게 평생 혼자 살라고 하고, 누군가는 얼른 좋은 남자 소개팅으로 만나 조건 보고 결혼하라고 하고, 누군가는 언제 외국에서 살아보겠냐며 외국 파견 신청서를 적극적으로 들이밀기도 하고, 우리 엄마는 직업을 바꿀 마지막 절호의 찬스라며 나를 살살 꼬드긴다. 평소에 반항 수업을 착실히 실천한 언니나, 누군가들은 잘만 사는데.


오히려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직장에서 주어진 대로 일하던 나와 같은 평범한 서른들은 맥을 못 추리고 누군가의 아무개 평가에 곧잘 얻어맞는다. 갈 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평가지표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는 그 모든 재단사들 앞에서 여기도 불통이요- 저기도 불통이라는 모든 곳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는 취준생 신세같다.



아 그래서 어쩌라고. 가끔 억울함이 치밀어오른다. 대한민국은 내가 아름다운 여자로 평범하게 사는 법을 잘못 가르쳐줬다.
‘공부 열심히 하고, 연애도 빠짐 없이 성실히, 그러다 사랑해주는 돈 1인분치 벌고 부모님 노후 걱정 없는 남자 만나서 결혼을 하고, 저출산 시대에 아이를 한 명 혹은 두명을 낳아 애국자가 되어서, 죽을 때까지 내 늙음에 누가 책임져주지 않음을 통탄하며 아파트 혹은 주식 투자에 머리를 싸매고나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버리는 것.’


이게 내가 체득한 우리들의 현주소다.

나는 그냥 나이고 싶은데, 그놈의 나이가 뭐라고. 내가 나로 살면 그저 아름다운 여인이 된다는 것을 다들 모르는 성 싶다. 엄마와 어제 통화 내용도 이러했으니. 엄마 왈,


“엄마가 어제 수영센터에 갔는데 글쎄 다들 젊은 여자들 아니면 완전 나이많은 할머니들만 있는거야. 엄마 나이대 여자들은 하나도 없어 보이더라고. 남자들은 아예 없고. 다들 어디 가서 노나 몰라. 엄마도 골프나 쳐야하는 건가봐. 안 그래도 00아줌마 알지? 그 아줌마가….”


나는 공감 능력 하나도 없는 매정한 딸이다. 그러므로 듣고 싶은 말 대신 이런 말을 날린다.


“엄마, 엄마가 하고 싶은 거 해. 누가 엄마 나이 물어보든? 오히려 그렇게 눈치 보고 안 하고 있는 게 더 늙은이같아. 그냥 하면 아무도 신경 안 쓴다? 아니 뭐 얼마나 예쁘다고 엄마를 누가 계속 너 몇 살인가- 하고 쳐다보고 앉아있겠냐고. 안 그래?”


엄마는 후웅, 하는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거절이다. 엄마의 ‘생각해 볼게’는 네 말을 알아들었지만 내가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엄마는 다음주에 골프 웨어가 왜 이리 비싸냐며 혹은 골프는 배우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며 푸념을 늘어놓을테지. 그런 엄마에게 나는 또 한숨을 쉬며 어디어디 센터로 가보라고 대신 찾아줄테고.



그런 우리 엄마가 평범한 아줌마냐고 묻냐면 그건 또 아니다. 대학교 갈 생각 말고 취업이나 하라며 알아둔 공장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와 1년동안 방 안에서 책만 읽으며 시위하기는 기본, 여자 혼자 여행이라는 게 위험한 발상일 80년대 초, 여관방 아저씨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굴하지 않고 1층 바로 입구 앞 방에서 자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문을 열고 잠이 들었던, 엄청나게 별나고 용기있던 여인이란 말이다. 그러다 뭐 아빠를 만나 나를 낳고,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게 되고, 그리고 정년 퇴임을 했더니 지금 오늘 이 시점이 되었다 이 말이다.


누가 우리 엄마를 평범한 대한민국 아줌마로 만들어 놓았는가.


나는 화가 났다. 반짝이는 청춘이었던 엄마를, 그 시절의 모든 여자들을 ‘집 안에서 밥 하는 여자’로 만들어버린 세상에게. 그리하여 고까운 세상 눈초리에 짜증을 내는 대신, 그 세상에 나를 위해 굴복하며 살아준 고마운 엄마에게 성을 내고 만다. 그깟 시선 뭐가 중하냐고. 엄마의 평생 용감함과 맞바꾼 세상과 순응, 스스로 반짝일 아름다움 대신 선택한 일상의 무력감을 나는 야금야금 먹고 이렇게 아름답게 커 냈으면서.



‘그러니 나는 엄마의 어떤 기대는 채워주어야만 한다.’ 그게 내가 가진 인생의 숙제였다. 모범생으로 자라난 건,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철학 책이건, 심리학 책이건 무언가 채워져 마음에 커다란 빈 블랙홀이 생겨버릴 때가 있다. 이렇게 남들 좋아보이는 개살구-애교 많은 막내, 자주 부모님 댁에 들르는 효녀, 제 알아서 금방 취직한 애, 죽지 않을 만큼 평생 먹고 지낼 똘똘한 정신머리-로 그만 살고 싶을 때. 나는 엄마가 바라는 삶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지금까지는.



서른을 기점으로, 나는 변했다. 이것도 대한민국 나이제의 폐해다. 스물, 서른, 마흔. 10년 간격으로 사람이 바뀌고 갑자기 어른이 되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스물 아홉 12월 31일의 나보다 서른 1월 1일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것만 같고, 다짐따위를 새로 세운다. ‘이제 진짜 어른이 되는 스텝 밟기.’ 그 스텝, 차차차인지 탱고인지 자이브인지 아줌마 직장 동료들에게 여쭤봤더니 글쎄 다들 이상한 라인 댄스를 추면서 너는 세계 탱고 챔피언이 되라, 아니다 요새는 스윙 댄스가 대세다 하고 있더라고. 우리엄마는 거기에 얹어서 ‘네 발재간을 어렸을 때부터 봐왔는데, 뉴욕 학교에 가서 제대로 발레를 배워보는 게 좋겠어.’와 같은 소리를 내게 하는 중이었다.



아름다울 것, 네 스스로. 네 가치를 증명할 것. 너를 사랑할 것. 나이니 직업이니 돈이니 다 떠나서 네가 오늘 하고 싶은 것에 망설이지 말 것. 삶을 버티지 말고 살아낼 것. 나를 놓지 말고 나다움을 선택할 것.


내가 생각한 어른다움이란 이것이고, 그리하여 망설임 없이 행동한다. 아프면 참지 말고 병가를 내고, 엄마에게 무조건 다 진실해야 한다는 어린 시절의 착한 어린이 병에서 벗어나 글을 쓴다는 비밀을 만들고, 아침에 일어나 무얼 하고 싶은지 생각하고 그런 생각조차 하기 싫으면 벌러덩 누워 살기 싫다고 칭얼거린다. 스스로에게. 뿌듯하다. 내게. 어른이라는 건, 서른이라는 건, 여자라는 건, 결국 모두 나의 현재이므로. 주식을 한 주 처음 사보고 즐거워하고, 다음 자취방은 낡더라도 아파트로 해서 원룸 살이를 그만 청산해야겠다고 과감한 결단을 내리며, 그래서 대출을 여기로 받아야겠다고 미리 검색한다.



이게 엄마가 원하는 ‘발레 학교’는 절대 아닐테지. 엄마가 보기에 나는 ‘능력이 충분한데,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가치로운 영혼의 가치없는 하루를 보내는 사람’일테지. ‘얘가 왜 이러나, 이렇게 엄마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는데.’ 싶을 테고.


“엄마, 나는 매일 엄마를 실망시키면서 살 거야.
그런데도 아름다울 게, 바로 나야.”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딸을,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본인의 희생으로 키워내 목숨보다 귀한 막내딸이 이상한 남자에게 데여서 차이기나 하고, 술에 꼴아서 새벽 4시에 택시를 타고 자취방에 겨우 귀가하고, 다음날 술병에 내과를 찾아 비타민 주사를 맞고 앉아있는 모양을 보지 못할 지라도, 모를 지라도 결국 알고야 말 것이다. 엄마의 모든 레이더는 나를 향해 있으므로.


나는 엄마를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게 내가 나만의 아룸다움을 갈지자로 찾아가는 여정을 거부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여정마저 아름다울 나의 30대를, 꼬부랑 할머니여도 누군가에게 비밀로 하고 술을 홀짝이고는 안 먹었다고 거짓말 할 여인의 미래를 응원한다. 엄마의 청춘을 빨아먹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된, 오늘의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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