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문장한의 과거 그리고 운명의 시작 - 행복을 꽃피우는 자
2-1
"그래, 직접 만나보니 어떻든? 네가 말한 대로 실마리라도 좀 잡았나 모르겠다."
걱정하는 목소리가 꽤나 다정하다. 밤 늦게까지 대신 꽃을 관리해주고, 싹을 틔운 씨앗들이 잘 자라도록 애정의 눈길로 물을 주었던 손길이 익숙한 사람- 장한의 삶을 먼저 살았던 선배이자 은퇴한 플로리스트.
-덕분에요. 우연한 기회로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꼭 잡아야죠. 그리고 오늘 꽤 재미있는 수확도 얻었는걸요. 이게 다, 아버지께서 하루 제 씨앗들을 잘 돌봐주신 덕분입니다- 아들 곧, 이 지긋지긋한 꽃집 그만할 지도 모르겠어요. 드디어. 아, 뭐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해-
그렇게 세상이 네 맘대로 되겠냐며 장한의 머리를 콩 쥐어박는 중년 남자의 표정이 인자하다. 조금 진한 쌍커풀에 선이 굵은 눈썹과 그 아래로 명확히 내려오는 곧은 코까지. 서로를 닮은 두 세대는 사실 얼굴보다 닮은 것이 더 많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위해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주는 마음가짐이라던가, 모든 생명을 사랑하여 아끼는 태도, 그리고 정해진 운명.
운명.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겪어야만 하는 어떤 특별한 일.
어떤 씨앗을 싹틔워야만 하는 일.
그래서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꽃이 되면 -
꽃의 주인을 찾아가거나 언젠가 자신의 꽃을 찾아오는 주인들에게-
자신들이 열심히 키운 몫의 행복을 건네주는 일.
왜 자신이냐, 왜 꼭 우리 집안이냐, 왜 꼭 서울 어느 결혼식장 앞이어야 하냐, 왜 꽃이어야만 하냐.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도 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누구도 운명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그저 랜덤뽑기에 걸린 한 생명줄이 우리 집이었나 보다며 껄껄 웃으셨던 장한의 할아버지는 그저 꽃과 식물이 좋아 플로리스트로서 자라온 줄 알았던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곧 그가 겪어내야 할 미래의 책임까지.
"사실은 말이다, 장한아. 우리 집은 조금 특별할 수도 있단다. 물론 저 하늘 위에서 보면 어떤 일을 하건 모두가 똑같은 생명으로 보이겠다만 말이다. 할아버지도 그랬어. 그리고 곧 네 삶에 왜라는 글자가 네 몸 안에 꼭 들어앉아 나오질 않을 게야.
장한아. 한 글자에 온 마음과 네 정신을 쏟지 않기를 바란다. 왜라는 질문은 잠시 스쳐가는 시간조차 짧은 인간 속에 사는 유령같은 존재가 된단다. 그리고 네 시간을 아주 순식간에 잡아먹지. 그래서 네 자신을 오롯이 보지 못하게 만들어. 왜라는 질문에 대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할아비 또한 아직도 유령같은 그 한 글자 속에서 갇혀 살고 있기도 하단다."
11살의 장한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말에 오히려 운율이 느껴져 아주 오래된 동화의 시작을 듣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에 덧붙여지는 이야기는- 오히려 동화였다면 너무 얼토당토않고 설정이 부족한, 빈약한 상상이었다며 놀릴 수도 있는 내용들이었고, 농담을 즐겨하는 할아버지의 또 다른 장난일 뿐이라며 웃어넘겼다.
그게 시작이었지- 한 남자의 고통과 행복의 모든 시작.
11살의 겨울방학. 할아버지와 어린 장한의 대화. 할아버지와 아버지 외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었던 비닐 하우스 온실의 두 번째 문. 여러 자물쇠로 굳게 잠겼던 문이 활짝 열리고 보인 광경. 그건, 구름 위에 떠 있는 씨앗들이 몽실몽실 한 데 모여 처음으로 들어온 장한을 왁 하고 놀래켜주던 순간에 멈춰져 있다. 기절했기 때문이다.
장한이 병원에서 링겔을 팔에 매단 채로 두 눈을 다시 떴을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벌컥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그 날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 미친 거예요? 나 곧 죽어요? 아빠- 이상한 게 눈에 보였어요. 진짜- 진-짜로 이상한 장면이었어… 말도 안 되는, 그러니까, 어, 그, 씨앗들이 둥둥, 정말 둥둥 하늘에 떠 있었는데, 근데 걔네들이 말을 다 할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짜잔 서프라이즈! 라면서 와글와글 막 떠들었고, 그리고 또, 막 내 몸 주위를 휘감고는, 주변에 와서는, 나보고 아빠랑 엄청 닮았다고, 그랬는데, 나는 분명히 할아버지랑 같이 비닐하우스 온실 안에 있었는데, 그랬는데…"
그랬지, 그랬었지.
퇴근한 아버지 대신 두 번째 온실 문을 여는 남자의 머릿속 회상이 일순간 멈춘다. 자신을 반기는 목소리들이 문 앞에 키득키득 소리를 애써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후- 한 번 긴 한숨을 내뱉은 그가 여고 담임 선생님처럼 문을 활짝 열고 말한다.
"야, 야. 니네는 어떻게 시간이 가도 변하지를 않니? 문 앞에서 사람 놀래키는 장난 좀 그만해. 나 이제 다 알아. 벌써 서른 여섯이라고."
[아잇 그러니까 내가 이번에는 문 앞 말고 다른데 숨어있자고 했잖아!]
[그래도- 몇 번은 그냥 속아주지! 너무해! 우리가 이 재미로 그나마 사는데!]
[나빠!]
[재미 없어, 치. 이제 진짜 안 해.]
자기들끼리 와글와글- 그새 머리를 맞대고 반응 한줄평을 남기는 것조차 익숙하다. 장한은 그들을 한 번씩 둘러보고는 잘 있었냐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기대에 차 묻는다.
"저기, 얘들아. 혹시 오늘은 쟤 다른 움직임 없었어?"
[쟤? 아니? 너네 봤어?]
[나도 못봤어. 평소랑 똑같이 숨소리만 겨우 색색 쉬고 물도 억지로 얻어먹었어.]
[맞아. 너 그러고보니 오늘 쟤 주인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에휴- 그럴 줄 알았다 장한! 네가 뭐 만난다고 갑자기 쟤가 변하겠냐?]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혹시 하고 기대했었는데,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