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문장한의 기막힌 자기 혐오, 그리고 류별 씨앗의 수상한 움직임
2-2
자기 몫의 화분집이 있지만 둥둥 온실을 자유로이 떠다니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익숙한 다른 이들의 행복 씨앗들.
이들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0년까지 이 자리에서 씨앗 혹은 아주 약간의 싹이 튼 새싹으로 산다. 장한 집안이 맡고 있는 건, 행복 중에서도 '다른 이들과 함께일 때' 쑥쑥 자라나는 식물들이다. 왜 꼭 장한 집안이었는지도 모르는 그 문씨 일가 남자들은 더욱이 왜 꼭 '다른 이들과 함께일 때' 자라나는 식물을 맡았는지 더욱이 모른 채로 그저 이들의 성장을 응원할 뿐이다.
제 때 물을 주고, 잎을 닦으며, 오늘 어떤 일로 얼마나 자랐고, 오늘 아무 일이 없이 왜 자라지 않았는지 종종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그러다가 마법처럼 평생을 함께할 누군가를 만나면 어느새 아름다운 꽃이 된 본인 몫의 행복을 주인들이 기필코 찾으러 온다. 늘 그들은 아주 우연한 기회로 자신의 가게를 들어오지만, 그럴 때마다 장한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아- 이 사람이 두 번째 창가 바로 아래- 종종 햇빛을 받으러 창틀에 누워 있으면서 창밖의 세상을 동경했던 그 씨앗의 주인이다.
정확히 본인들의 씨앗과 같은 향이 풍겨오기 때문이다. 다 같은 식물이고, 씨앗이라고 하지만 장한에게는 아주 다르다. 약간의 촉감과 비슷한 흙내음 속에서도 장한은 이 모든 씨앗과 새싹들, 더 나아가 행복 식물이 아닌 모든 식물들의 특징을 귀신같이 잘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의 냄새도. 사람마다 가진 마음의 향은 대부분 마치 흙과 얼마간의 바람과 햇살 냄새와 비슷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같은 향을 품고 살지 않는다. 장한에게 사람들이 가사로 쓰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던가,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따위의 말들은 실제 일어나는 일이다. 마음에 향기가 있다는 은유적인 시를 보면서도 장한은 그렇지, 맞지, 그 냄새 참 다양하지, 하는 이상한 추임새를 넣을 뿐이다. 덕분에 고3때 수능을 보기 위해 장한은 직접 겪지 못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모두 느껴버리기 때문에, 시인들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시를 읽고 난 느낌마저 달달 외워야 했다. 그는 삶에서 누군가를 만나 주인공이 되어 엉겁결에 활짝 핀 자신들의 행복을 찾아가도록 예쁜 꽃다발로 만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런데, 장한이 이 곳에 발을 디딜때부터 단 한 번도 씨앗에서 새싹으로조차 자라지 못한 단 하나의 생명이 있다. 처음 몇 년 간은 그저 애정을 쏟으며 기다렸다.
[너도 살아남느라 힘들지? 너도 네 몫의 삶이 나처럼 고달팠나보다. 그래서 너는 누군가를 곁에 두려고 하지 않는 걸 선택했구나. 참 안쓰러운 생명이야.]
그런 날이 쌓이던 어느 날, 장한은 깨달았다. 이 씨앗이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가, 어차피 플로리스트로 살아가야 하는데 뭣하러 힘들게 어려운 공부 하냐며 만류하던 부모님의 걱정을 무릅쓰고 이것이나마 자신의 뜻대로 하게 해달라며 조르고 졸라 과학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또 거기서도 남들이 쟤는 왜 저런 대학을 가려고 하냐 수근거림을 견디고 수의과대학을 졸업하여 결국 이 온실의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정식 주인이 될 때까지 겨우 몇 번 꿈틀거린 게 다라는 사실을 말이다.
꼭 자신 같았다.
마음이 자꾸 기운다.
공평하게 한 번만 가야 할 시선이, 하염없이 한 곳을 향한다.
꼬박 20년 가까이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며 진심으로 즐거웠던 적 없는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외롭고 사무친 건지 그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네 차가운 마음이- 오늘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나 조금 알겠어. 내가 생각한 이유랑 꼭 닮았더라, 네 주인.]
단 한 번도 되고 싶지 않았던 무거운 자리, 행복 관리자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짊어져야만 하는 문씨 가문의 남자로 태어난 게 죄였던고- 왜 꼭 자신이어야만 했는지, 왜 자신은 이런 곳에 이런 가족에게 태어났는지 불쑥 화를 내기에 그는 서로 살뜰히 챙기며 아들을 사랑하는 부모님을 존경했다. 그리고 특별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어 랜덤 뽑기에 걸린 자신들은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 전생에 나라 정도는 구해서 상을 받고 있는 거라고 재기발랄하게 늘 삶을 긍정하던 할아버지를 또한 좋아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같은 하늘 아래 다양한 몫을 가지고 태어나고, 이 모든 걸 견디거나- 혹은 즐기거나 살아가는 다른 가족들에 비해 자신만이 모났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스스로는 참 매력이 없고, 운명에 도망칠 생각조차 않는 자신은 머저리에- 용기 부족인 멍청이라고. 서울에서 큰 화원을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중,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쉽게 내뱉는
'장한은 우리랑 태어난 수저가 다르다. 저 집 삼성역 주변 결혼식장 근처에 아주 큰 3층 단독주택이다. 거기에 살면서 게다가 넓은 온실까지 옛날부터 갖고 있다더라. '
라는 말을 듣는 날에는 3층, 자신의 방 문을 꼬옥 닫고 교복을 벗을 생각도 않은채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가슴을 쥐어뜯곤 했다.
다, 각자가 견뎌야 할 삶이라는 게 있는 거고- 넌 그걸 받아들여야만 해.
여기서 네가 불평해봤자 바뀌는 것 하나 없어.
나 하나만 즐겁다고 생각하면 삶이 편해질텐데,
넌 왜 그것조차 못해서 이렇게 난리인 거야.
못났다, 문장한. 욕심꾸러기 독불장군
스스로에게 거는 말은 주로 채찍과 힐난이었다. 또한 제 욕심 하나만 버리면 행복 플로리스트로서 평화롭게 살아질 스스로가 미워질수록 그는 비밀의 온실 안에서 자신을 반겨주는 씨앗들에게 미안했다. 긍정적인 기운만 쑥쑥 먹고 자라나야 할 초록 생명들 앞에서, 관리자라고 하는 인간이랍시고 불경하고 어두컴컴한 마음을 품다니. 자신이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아니야, 너네를 싫어해서 이 삶을 싫어하는 건 아냐. 그건 알아줘.
그래서 그들의 모든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장한은 매일같이 최선을 다했다. 내 몫만큼, 너희들이라도 아름답게 피어 주인을 찾아가 줘. 기쁜 삶을 살아줘. 누군가에게 기대며 따스히 살아가줘. 꽃이 되어줘. 내가 네 주인을 꼭 찾아줄게. 아름답게 자랄 수 있도록 조금씩 자라나는 네 오늘을 응원할게.
특별한 씨앗의 주인을 만나 그런가. 오늘따라 쉽사리 옛날 생각으로 돌아가게 된다며 장한이 조심스레 오늘치 눈길을 준다. 그리고 익숙하게 씨앗에게 말을 건넨다.
[...근데,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다른 것도 몇 가지 있더라. 내 이야기를 듣고나서는, 나한테 날 위해 행복하지 않냐고 묻더라고. 갑자기 내가 벗겨진 기분이었어.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든. 사람들을 싫어해서 주변에 누가 와도 남에게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예리한 구석이 있었어. 진짜 사람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절대 상대방의 말에서 통찰력을 보이지 않아. 관심 없거든.]
[...그리고, 하나 더. 네 주인, 내 생각보다 훨씬 예쁜 사람이더라. 주변 사람들이 왜 그동안 저런 여자를 혼자 놔뒀나 싶을 정도로. 저렇게 예쁜데 왜- 나였으면 억지로라도 곁에 있으면서 함께 붙어있는 행복을 알려주려고 노력했을 것 같은데 말야.]
그 때였다. 장한의 핸드폰 화면에 불빛이 반짝인다. 무심코 화면을 쳐다본 장한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굳어버리고, 그의 반응에 재미있는 게 있는건가 싶은 행복 새싹들이 날쌔게 달려온다. 그리고 핸드폰 화면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떼로 칭얼거린다.
-좋아요. 뭐 세 번은 그렇고, 다음에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남한테 얻어먹고 입 싹 닫는 거 싫어해서요. 빚지고 사는 거 너무 싫어하는 성격이라.
- 다음에는 언제 볼까요?
핸드폰을 오른손에 쥔 채로, 장한은 왼 손을 머리 위에 갖다댄다. 그리고는 넋이 나간 듯 스스로를 쓰다듬는다. 나, 오늘 잘했나봐. 사실 나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나 어떻게든 호감이었나봐. 문장한, 장하다. 너 기특해.
아차차, 이럴 때가 아니지.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답장을 해야 한다. 그래서 별과 다음 약속을 재빨리 잡아야겠다. 그의 손가락이 허둥지둥 자판을 눌러 글자를 만든다.
[유별씨 시간 될 때 언제든지요. 전 당장 내일도 좋아요.]
풀썩- 푸울썩.
20여년간 크게 움직인 적 없던 씨앗이 소심하게 떨린 것을, 장한은 핸드폰 메세지에 집중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