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울렁이는 마음, 류별의 설렘은 장한의 작은 비밀에서부터
3-1.
낙엽 밟는 소리가 평소에 우리가 못 듣는 데시벨이래요.
그래서 들으면 심신 안정이 된다고 해요. 어때요? 직접 걸어 보니.
-어, 솔직히 말해도 돼요?
제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슨 용기로 제가 여길 걷고 있는거죠?
"음, 글쎄요. 한 발자국 옆사람이 주는- 응원의 온기를 흠뻑 받아들이는- 그런 용기?"
-어어, 저 앞에 저 까만거 뭐예요. 나 여기 나갈래. 인도로 갈래!
"어, 잠깐만. 저거 그냥 나뭇가지잖아요. 나뭇가지 떨어진 거. 괜찮아요. 좀 더 걸어보는 건 어때요?"
여자는 남자의 오른쪽에서 그의 오른팔을 잡고 걷는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손을 의식하며 천천히 걷는다. 바스락바스락- 바사삭. 반스와 아디다스 운동화가 번갈아 낙엽 밟는 소리를 내고, 그런 둘을 지나치는 산책하는 할머니 두어 명. 그리고 보조바퀴가 없는 자전거를 처음 타는 듯, 휘청이는 파란 운전대를 붙잡고 용케 전진하는 헬멧 쓴 남자 아이와 그 뒤를 노심초사 종종걸음으로 따라붙는 아이의 아버지가 저 멀리 보이는 동네 공원. 별과 장한은 토요일 5시,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무렵에 낙엽이 무수히 쏟아진 산책길을 함께 걷고 있다.
세상에서 거미와 갑자기 떨어지는 개미, 벌 같은 다리 달린 곤충들을 제일 싫어하는 류별이 한차례 거절했던 장소. 그 곳을 장한은 함께라면 할 수 있다- 자연을 제대로 맞이하기 두려운 별씨 옆에 꼭 자신이 있어주겠다- 만약 거미나 벌이 갑자기 달려오면 자신이 온 몸을 막아서 지켜내겠다고 신신당부를 하여 열 발자국만 걸어보자고 한 게 스무 발자국, 곧이어 100발자국 째를 경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장한의 설득은, 오늘 같이 간 곳이 류별이 강추한다며 장한이 좋아하지 않는 장소를 데려간 까닭에 힘을 얻었다.
독립출판 작가 북 콘서트 및 작가 만남회.
장한은 지하철에서 내려 10분 정도 걷고 왼 쪽으로 꺾어, 술집 거리 끝자락까지 다다르면 만나게 되는 샛노란 독립 서점 문을 여는 게 꽤나 곤혹이었다. 류별이
시간과 장소는 혹시, 괜찮으면 제가 몇 개 보내드려도 될까요?
저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요. 음- 사실 제가 다음 주 주말에 이미 선점해놓은 스케줄이 있어서. 그 스케줄을 저와 함께 가시는 건 어떨까 하고요.
어, 물론 대신 제가 참여비나 그런 건 다 낼게요!
제 스케줄을 함께해 주시는 거니까, 어떠세요?
라고 보내왔을 때 자신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OK를 외친 것이 잘못이었던 거지. 자조하는 장한의 마음을 류별이 알게 된 건 이미 작가가 자기 인사를 한 이후였다. 귓속말로 장한이 속삭인 말-
"저 사실, 독립출판물 별로 안 좋아해요. 근데, 류별씨가 오자고 해서 온 거예요."
화들짝 놀란 류별이 어쩔 줄 몰라 두 손을 모으고 손톱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장한이 이를 보며 다급히 별의 손을 제지한다. 그리고는 씩 웃으며 다시금 귓속말.
"저 류별씨를 위해서 제가 싫어하는 데 왔으니까 제 소원 하나 들어주기예요. 다음에!"
그 바람에 한껏 불편해진 마음이 부풀어진 류별이 옆 사람이 더운가, 추운가, 근데 왜 싫어하는가, 궁금해 죽겠는 눈치로 두 시간동안 가시방석에 앉았다는 걸 장한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억지로 좋은 척 하기에 나는 그리 영악한 사내가 아니라서. 류별씨를 불편하게 해서 내가 더 미안하네, 괜히 말했나 싶다며 장한은 별에게 사과의 말을 쪽지로 건넸더랬다. 그리고 덧붙인 몇 문장에 여자의 마음이, 아주 조금, 울렁인 것 같기도.
[제가 별씨의 소중한 시간을 망가트려서 죄송해요.
저는 별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좋은 사람이 추천한 이 콘서트를
적어도 비뚤어진 자세로 견디지는 않을게요.
무언가를 싫어한다고 단정지었던 고집을
제 삶에서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어 고마워요.]
그리고 진행된 두 시간이 조금 넘은 작가와의 만남은, 장한에게 실제로 생각의 변화를 일으켰다. 엉덩이를 등받이에 멀찍이 떨어뜨리고, 나른한 듯 등받이에 등을 있는 대로 기댔던 장한의 태도 변화는 주변에 있던 모두가 금세 눈치챌 정도였으며, 초대한 여자는 그가 아주 조금 귀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류별은 자신이 억지로 끌고왔던 남자가 점차 허리를 곧추세우고 턱을 괴었던 손을 떼서 공책에 볼펜으로 무언가 적고 있음을 확인하고 살풋 웃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차오른달까. 독립출판물을 어떻게 발행하며 어떤 이유로 글을 쓰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이 이어질수록 장한은 이리저리 책장으로 돌리던 시선을 작가에게 고정했다. 그리고는 질문 시간에 여러 개 묻기도 했다. 그리고는 정말 잘 데려와주었다며, 평생 못 꺾을 것 같은 자신의 생각 고집을 꺾는 건 역시 자신이라며 스스로를 대견해하기도 했다가, 옆에 있는 류별을 뒤늦게 발견했다는 듯 툭툭 어깨를 치고는
[류별님, 오늘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제가 자랑스러워요!
이런 기회를 주신 류별님께 제가 너무 감사해서 어쩌죠?]
라며 그 자리에서 작가의 책을 구매하기까지 했다. 귀여운 양반이야, 생각보다. 생긴 건 어디 성수동 한 복판에 세워놓으면 단역 배우라도 할 생각 없냐며 누군가 캐스팅할 정도로 진하게 잘생겼는… 나 지금 잘생겼다고 한 거지-? 혼란스러워가는 류별의 마음속이 시끄러워지고, 장한은 그런 그녀의 속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휙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제안했다.
[류별님, 주변에 공원 있던데 우리 저녁 예약 전까지 좀 시간이 뜨네요.
좀 걸을까요? 우리 둘 다 가을 좋아하니까- 계절을 마음껏 느껴봐요.]
그리하여 류별이 갑자기 뒤덮인 낙엽 속에서 거미가 출현할 두려움을 안고서 장한이 권한 길로 산책을 하게 된 것이다. 발 밑의 감각이 신기해 마냥 땅을 쳐다보고 있는 여자의 눈길을 받고 싶은 남자가 흠흠-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는 여자에게 말을 건다.
[아- 덕분에 정말 좋은 경험을 했어요. 다 류별씨 덕분이에요.]
"뭘요. 미리 이런 데 좋아하시냐고 물어볼 걸 그랬어요. 괜히 장한씨 불편하게 만들었어. 근데, 그럼 처음부터 말하지! 왜 말 안했어요? 약속 잡기 전에 말할 수 있었잖아요. 이런 데 싫다고."
자연스레 스스로를 힐난하던 류별이 장한을 밉다는 듯 가자미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 여자를 보며 이제는 발 밑에 뭐가 있는지 신경쓰지도 않고 말도 잘 건네는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남자는 입을 빠르게 뗀다.
[사실대로 말해보자면, 좀 부끄럽긴 한데. 그, 예쁘게 봐줄건가?]
"예쁘게요? 미안하지만 장한씨 얼굴은 예쁘다 보다는 멋있다에 가깝…그렇지, 어 허허.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음, 귀엽게 봐주도록 노력할게요. 얼른 말해 봐요, 그러니까. 뭔데요?"
[알았어요. 귀엽게 봐준다니까 그것도 좋은 것 같네요. 저, 류별씨 마음 바뀔까봐 겁나서 그랬어요.]
느에- 바람 빠지게 말과 감탄사 사이의 어떤 소리가 별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장한이 킥킥거린다.
"별씨 반응 진짜 웃길 때 많은 거 알아요? 그건 무슨 소리래?"
[아, 진짜! 놀리지 말아요! 아무튼! 제 마음이 뭐가 바뀌는데요?]
"음, 별씨를 얼른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별씨가 저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마음 바뀌기 전에 가장 빠른 시간으로 바로 답했더니 그게 독립출판작가 북콘서트더라고요.
어, 여기서 제가 왜 그동안 독립출판물을 싫어했는지 얘기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그냥 책 싫어하는 사람 될까봐.
저, 책은 엄청 좋아해요.
사실- 어, 저여서 싫어해요.
저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