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소개팅 동상이몽 문장한편
쉽게 유별이라고 불러도 될 것을- 류와 별 사이에 힘을 주어 끊고 발음에 신경 써서 자신을 불러준다. 생각에 잠겼던 류별이 단정하고 차분한 남성의 말투에 집중한다. 그녀 앞에는 따뜻한 허브티를 호호 불어 한 입 머금고는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앞에 앉아 있다. 정신 차려, 류별. 앞 사람에게 예의를 갖춰야지. 혼자 생각 그만해. 스스로를 금세 채찍질하는 마음새가 빠르고 익숙하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류별이 눈을 맞춘다.
저도 가을이 좋아요. 우리 어떤 이유인지 서로 말해볼까요?
둘 다 똑같네요 하는 가벼운 호응, 그리고 웃음. 장한이 끄덕이고는 먼저 대답한다.
-좋죠. 재미있겠네요.
전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다짐하거나 결심해서 가을이 좋아요. 제가 결혼식장 앞에서 꽃을 팔며 알게 된 게 있네요. 대단한 사실은 아니고요. 그저 가끔 한가한 시간들을 흘려보내다보면 붙잡게 되는 생각들이에요, 음- 계절에 따라 사람들이 품는 사랑의 온도와 농도가 비슷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계절이 주는 분위기라는 게 있다고 말예요.
봄에는 주로 새로이 시작하려는 수줍은 20대 초반의 남자분들이 찾아올 때가 있어요. 그분들 중에서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분도 계신데, 고등학교 때 짝사랑 했던 여자분께 좋아한다며 고백하러 가는 분이 있는가하면, 대학에서 만나 CC가 되어 사귄지 100일 기념일을 축하한다며 10송이 장미를 사러 오는 분도 계세요. 그럼 전 함께 싱그러워져요. 풋풋하고 귀여운 사랑의 향이 느껴지거든요.
음- 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어느 정도 따스하고 단정하기도 하고, 좀 더 깊이 서로를 배려하는 성숙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가을에 꽃을 사러 오시는 분들의 분위기를 선호하게 됐습니다. 약간 쌀쌀한 공기를 니트나 코트에 묻혀오는 손님들의 구두 소리나 숨길 수 없는, 좀 더 단단해진 사랑의 향 같은 것들이요. 프러포즈를 한다던가, 만난지 1년이 되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한다던가,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가는데 바깥에 신문지로 포장해놓은 꽃이 참 예뻐 와이프 생각이 나서 들어왔다던가- 하는 농도와 결, 온도 같은 것들을 저는 참 좋아해요. 가을의 사랑들이 제게 마음을 부탁하고, 저는 제 마음 속의 애정과 관심을 듬뿍 담아 꽃을 골라 손님들에게 건네줍니다. 거기서 저는 참 행복한 순간이다- 느끼곤 해요.
아, 제 이야기가 좀 길었죠? 류별님은 어떤 점에서 가을을 좋아하시나요?
류별이 조용한 듯 하다가도 자신의 의견을 밝힐때면 말이 길어지는 소개팅남을 바라본다. 낭만을 품고 사는 사람- 그녀가 장한에게 내린 첫 평가이다. 그리고 별도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한다.
[저는- 장한님처럼 누군가를 보고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좀 머쓱하네요.
사실 봄이나 겨울에는 억지로 나가야 하는 행사가 많아서 싫은데. 신입사원 환영회라던가, 부서 회식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봄에 많아요. 그리고 겨울에는 연말 행사니 뭐니 하면서 억지로 참석해야 하는 귀찮은 일들이 많아서 싫고요. 남은 건 그럼 여름이랑 가을인데, 제가 또 땀 나는 건 싫어하는 터라. 이유가 너무 버석하죠? 그러니까 저는 가을을, 절 귀찮게 하는 모든 행사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라서 좋아하네요. 아, 또 있어요. 혼자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서요. 이상하게 다른 겨울에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네 뭐네 하는 오지랖들이 꽤 많은데, 가을에 혼자 다니는 건 분위기 있다며 다들 뭐라고 안 하더라고요.
좀 웃긴 사람들인거 아녜요?
난 늘 똑같은데 자기들이 뭐라고 맘대로 바꾸어서 판단해-
언제는 대단하다고 박수치다가, 또 언제는 쓸쓸해 보인다며 금세 마음을 바꾸고 말예요.]
장한은 금세 불만에 뒤덮인 그녀를 보며 쿡쿡- 조용히 웃는다. 내가 웃겨요? 아, 아니요- 재미있는 분이라서요. 솔직하시네요. 같은 대화를 이어나가던 두 사람은 이내 자리를 옮긴다. 맛있는 뇨끼집을 알아 예약해놨다며 장한이 앞선다. 뒤따라가는 류별이 스쳐가는 바람에 실린 화원 향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열심히 걷는 남자의 뒷통수에 대고 말을 건다.
[근데, 장한님은 그럼 가을을 좋아하는게 꽃집을 찾아온 사람들 때문인 거네요? 장한님 스스로 때문이 아니라? 그건 나랑 똑같은 것 같아. 나도 그렇거든요. 사람들 때문에. 가을에는 사람들이 나한테 다가오질 않아서. 그래서 편안함을 느껴서요.
그러고 보면, 세상은 내가 어떤 계절을 오롯이 느끼게 가만히 놔두질 않는 것 같….
장한님? 왜 그래요?]
갑자기 멈추어 선 등에 당황한 여자 앞에는, 뻣뻣하게 굳은 표정의 남자가 손으로 입을 가린채 서있다. 잠시 몇 초간의 정적. 그리고 어느새 다다른 문 앞. 애써 밝은 목소리로 장한이 예약한 사람이라며 종업원에게 이야기하고서 나란히 앉는 두 사람을 레스토랑 사장님은 웃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잠시 실례하겠다며 테이블 위에 놓인 향초에 불을 붙인 뒤 주문을 받는 종업원이 사라질 무렵, 곰곰이 생각한 그의 대답은 이곳 참 예쁘다며 주변을 둘러보던 별의 귓가를 감쌌다.
그런 생각, 한 번도 못 해봤어요.
덕분에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네요. 고마워요.
[으어, 에, 예…? 제가 뭘 했다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여자가 눈을 위로 치껴뜬다. 그리고는 눈알을 요리조리 굴린다. 자신이 한 말을 되짚어보는 건, 무언가 남들이 자신을 향해 뜬금없는 소리를 할 때 별이 가진 습관이다. 본인이 무얼 잘못한 건가 싶어 머리 위로 쓰여지는 물음표가 둥둥 뜬 채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를 보는 류별의 모습에 장한이 그런 것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리고 붙여지는 친절한 설명.
-스스로를 위해 가을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다는 말이요. 그러고 보니 저는 사람들이 주는 사랑의 기운이 좋았던 거네요. 그 사람들을 위한 좋아함이었던 것도 같아요. 그래서 다시 생각하는 중이에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계절은 뭘까. 사람들 말고 내가, 나를 위해 좋아할 시간은 어디 있는가, 하고요. 재미있는 시각이었어요.
그런데-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그렇게 류별님 말을 곱씹다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준 게 아님을 확인한 별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긴장이 풀려 전보다 편한 웃음이 지어진다.
[네- 어떤 거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이며 명료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에게 장한은 마음 속의 단어를 몇 개 고른다. 내가 이 질문을 위해 당신을 저 멀리서 불러낸 걸, 모르겠지요. 모르셔도 됩니다.
-류별님은, 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싫어요?
제가 보기엔 류별님처럼 배려심 있고 선하신 분들이라면 사람을 싫어할 수 없거든요.
누군가와 함께해서 한 번이라도, 행복을 느낀 적 없었어요?
당신이 누군가와 함께하는 행복을 위해, 직접 물도 주고 심어보려고 합니다.
단 한 번도 씨앗조차 틔워낸 적 없는 유일한 생명이여- 저를 만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 정원사가 이렇게 당신 몫을 소중히 지키고 있으니까요-
이유 모를 진한 웃음기와 그에 상반되는, 자신을 꿰뚫는 질문에 류별이 한껏 당황한다. 그런 여자 앞에 앉아 멀리 있는 파스타를 덜어 건네주는 남자는- 이상하리만치 소개팅 자리에서 하지 않을 질문들만 골라하고서는 진심으로 답을 기다린다는 듯 별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끄덕- 끄덕. 몇 번의 작은 움직임으로 주저하는 별을 응원까지 한다. 대부분 남자들이 소개팅을 하면 이런 대화를 나누는건가- 아무래도 이번 소개팅도 망한 게 분명하다 생각하는 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사람이 주는 '당신이 왜 그런지 진심으로 이유가 궁금하다.'는 눈빛이 싫지 않다. 에라 모르겠다-
[엇, 어, 음 그게 말이죠. 어, 음.
사실 처음 만나는 분께 말씀드리기 좀 부끄러운 마음이라. 그렇네요. 엇- 일단 착한 사람으로 봐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여기서의 저는, 제가 잠깐 만들어낸 사회화가 최대치로 달한 한 여자의 단면일 뿐이라서요. 저, 그렇게 안 착해요. 사실 친하다는 친구도 없고요. 주변 회사 사람들 중에서도 끝나고 따로 만나거나, 일 외에 잡담하는 그런 인연 단 하나도 없어요. 상처받고, 상처주잖아요. 사람들이 모이면. 전 그걸 극도로 싫어하는지라. 좀 재수없어 보이려나요? 뭐 나름의 변명이라고 좀 하자면- 사람들이 제게 상처주는 건 어떻게든 견디겠지만, 제가 누군가를 상처주는 건 절대 참을 수 없거든요. 그럼 전 제가 또 싫어져서. 아주 악질의 연결고리죠? 스스로를 사랑하지는 못해도 혐오하지 않고 살려면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포기해야겠다고 결론내렸어요. 그래서 그래요.
어, 소개팅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이었던 것 같긴 한데- 아 그렇다고 제가 남자 친구를 아예 안 사귀고 싶단 건 아니고요. 어, 저를, 이런 저를 이해해 줄 어떤 사람이 생기면 뭐, 언젠가는 연애하지 않을까요,
하, 하하, 하하하.]
어차피 자신이 누군가 진심으로 사랑할 거라는 생각도 없는 별은 한 번 만나고 말 심산으로 자신의 꼬인 심산을 풀어내주었다. 그리고서 장한을 살핀다. 알 수 없이 웃는다. 자신의 요상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방실방실 웃고 있는 남자는 처음이다. 대부분은 여기까지 듣지도 않을 뿐더러, 약간의 비슷한 낌새만 보여도
'이 여자는 꽤 연애하기 불편하고 어려운 여자일 것이다.'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단 말이다.
그 순간 별은 생각한다. 저 남자의 속마음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고. 대체 무슨 마음가짐으로 처음 만난 이성에게 왜 사람이 싫냐고 물어보는지, 속내가 궁금해 죽겠다고.
허둥거리는 여자를 보며 진하게 웃음짓는 남자의 정확한 속마음이란- 이렇게 시꺼멓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20년째 말라 비틀어진 씨앗 고객님.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당신의 삶에 앞으로 함께하는 사랑의 즐거움을, 어떻게든 알게 해 줄게요. 날 위해서. 그러니 부디, 내게 잘 따라와 주길. 날 사랑해도 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되니-
어떻게든 사랑에 빠지길.
사람과 함께하길.
그리하여 장한은 별에게 묻는다.
우리, 딱 세 번만 만나보는 건 어때요? 저, 유별씨 대답- 정말 마음에 들거든요.
온 몸으로 경계 발령이 내려진 여자의 눈에 담긴 당혹감마저 은은하게 흡수하는 남자의 얼굴은, 쉽사리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별에게 매력적이었다.
아, 이새끼도 또라이구나. 만만치 않은 자식인데?
타이밍 좋게 등장한 사장님이 음식은 입에 맞으시냐며, 원하시면 스테이크에는 와인 한 잔씩 서비스로 드리고 있으니 인스타에 태그 좀 부탁드린다는 홍보의 말을 건네고 사라진다. 50대 남자가 좋아하는, 레스토랑 운영자로서의 행복은 지금같은 손님들을 관찰하는 시간에 있다. 두 남녀 사이의 긴장감을 즐거이 관람하는 것.
청춘이다- 좋을 때다.
레스토랑 노래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달달한 노래' 플레이리스트로 바꾸어놓으라는 지시를 내린 그는 와인잔을 괜히 몇 번씩 호호 불어 마른 수건으로 닦는다. 토요일 저녁의 연남동 레스토랑의 공기는 한 여자 빼고 모두에게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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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직접 만나보니 어떻든? 네가 말한 대로 실마리라도 좀 잡았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