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건오의 어느 겨울날, 헌팅일지
2.
어이가 없었다. 왜 도망치냐고.
안 그래도 교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일 갈 출장지가 무슨 학교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서울에 학교는 많고 하필 자신의 회사와 계약한 곳이 그 여자애가 있는 거기일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단 말이다. 그리고, 만약 만나도 뭐.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새하얀 얼굴로 도망칠 일이냐고. 자신이 무슨 귀신이라도 되었냐고. 참 나.
어제 강남에서 친구와 술 한 잔 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아, 여기 더럽게 재미 없는 동네다. 담배나 한 대 피고 집에 들어가야지.
집구석이건 바깥이건 친구 새끼들이랑 희희덕거리는 것도 지겹다. 심심했다. 좀 더 술 한 잔 하고 싶었는데, 경기도 강배시로 이사 오는 바람에 3차를 가는 놈들을 뒤로한 채 지하철을 타야 했다.
그러게 왜 집을 옮겨가지고.
왜 가게 위치를 제 맘대로 바꾸냔 말야. 거래처들도 다 서울이면서.
말보로 레드를 쥔 손이 익숙하게 라이터를 찾았다. 탁- 불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고개를 무심코 휙 들었을 때에는
-저 달 너무 예쁘다! 사진 찍어야징 헤.
자신이 무슨 말을 실제로 내뱉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카메라에 달을 담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예뻤다. 눈이 반짝이는 게, 갈색 트위드 자켓과 청바지를 몸에 딱 맞게 입은 모습도 귀여웠고. 키도 크고 머리도 길고, 눈은 크고 화려한데 웃기도 잘 해.
전반적으로, 딱 내 스타일이군.
마음에 드는 여자다. 근 6개월간 전여친과 헤어지고 나서, 강남이건 홍대건 여러 군데 돌아다녔지만 꽤 괜찮은 여자는 봤어도 제 스타일의 딱 맞는 외형은 없었다. 그래서 가벼운 인연을 몇 번 맺었다 헤어지고- 독수공방을 나름 길게 이어가던 차. 잘됐다 싶었다. 남자는, 직진이지. 따라가서 전화번호나 물어볼까? 나 꽤 잘생겼는데. 어디 가서 별로라는 얼굴은 아닌데.
…어어 빨리 붙잡아야겠는데, 하려면. 갑자기 어떤 골목길로 휙 돌아서 사라지는 여자를 황급히 붙잡아야겠다 다짐한다. 할 말이야 뭐, 얼굴 보고 생각하면 될 터. 그래서 긴 다리를 쭉 뻗어 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어깨에 손을 댈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여자는 아직도 모르네. 약간 둔한 편인가. 일단 웃는 얼굴 장착. 지금까지 이 얼굴로 누구한테 비호감이란 소리는 들어본 적 없으니 사실 자신있다. 고등학교 때에는 선생님들이 이상하게 나만 보면 좀 자거나 지각해도 봐주더라고. 그게 내 얼굴때문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고.
-저기요.
제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는데, 그것도 다 이해하는데 제가 안 하는 것 보다는 하는 게 더 후회 없을 것 같아서요. 그 쪽 혹시 남자친구 있으세요? 없으시면 번호 좀 주실래요?
내민 핸드폰에 두 눈을 깜빡이며 가방끈을 조여매는 모습이, 꽤 귀엽다. 놀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네- 더 좋잖아? 신선한 반응이야.
아무 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기에 생각했다. 아, 혹시 외국 사람인가.
-그, 혹시 외국…분…?
아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 너무 놀라서. 허, 하하, 하하하. 그… 그러죠! 어 아 어, 근데 어… 그게 그! 그래요! 우리 그러지 말고 지금 그럼 맥주 한 잔 할까요? 그러는 건 어때요? 번호 대신 지금!
나야 땡큐지. 앗싸, 땡 잡았다. 이것들아- 강남에서 잘 놀아라. 난 집 주변에서 예쁜 여자 만나서 놀 거다 이제부터. 승자는 나다. 벌써 내일 자랑할 생각에 기분이 째진다. 주변 가까운 맥주집에 갔다. 그리고 좀 취했던 것도 같고- 그리고 일어나보니 뭐, 성인이 이성간 밤에 하고싶었던 일을 한 후였다.
이런 건 처음인데-
이렇게까지 처음부터 하고 싶던 여자는 아무도 없었는데, 너 뭐야. 나랑 더 만나줘야겠어.
…그렇다고 그 여자를 출장지에서 오후에 당장 만나겠다는 건 아니었다고.
근데 개같은 건, 그런 나를 보고 미친듯이 도망치고 보는 저 애의 뒷모습. 단정한 긴 치마에 셔츠를 입은 네 모습보다, 난 어제 딱 붙는 바지에 코트가 더 잘 어울린다 생각하는데. 그리고- 제일 화가 났던 건
-아, 부장님! 저 평가로 물어볼 거 있는데, 지금 교실에 빌릴 것도 있고. 부장님 교실로 가요!
-어, 부장님이라고 부르는 거 보니까 확실히 뭐 필요한 거 있네. 알았어 알았어. 가자 가. 문재는 집에 가니? 잘 가고 내일 보자.
나도 몰래 뒤쫓아갔던 여자애가 다른 남자한테 보란듯이 가버렸다는 거. 아주 친한 사이같던데. 팔도 잡고, 목 끝까지 하얀 셔츠를 잠근 안경 낀 남자라니-
누가 봐도 저 둘이 잘 어울리잖아.
개같아. 담배 땡기네. 학교는 금연이랬는데. 더 개같군.
제목 이미지 출처: 배인혁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