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이번 장르는 로코 3

(3) 기재의 8년 전 겨울, 그리고 여전히 임겨울

by 라화랑

3.

생각해보니 그 날부터였던 것 같다. 임겨울이 이상해진 게. 실장님이 전체 메세지로 공지사항을 돌린 날. 앞으로 한 달 동안 교장선생님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천장등 교체 공사를 할 예정이라고. 학교에 외부인이 들락거려도 놀라지 말라고.


교사가 이렇게 컴퓨터로 계획서를 많이 써야 하는 직업인 지 미처 몰랐다는 너스레를 떨며 대학 때와 달리 쓰고 다니던 안경이 없어졌다. 무채색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를 돌려입던 옷차림이 묘하게 밝아지고 부드러워졌다. 베이지 색 원피스라던가, 하늘하늘한 분홍색 치마라던가 하는 옷들을 겨울이 어느 날부터 입기 시작했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서 뽀얀 피부에 반짝이는 섀도우를 눈 위에 칠하기도 했다.


겨울의 반 학생들은 우리반 쌤이 갑자기 바뀌었다며 소문을 내고 다녔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겨울이 곧 결혼한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퍼져나갔다.


기재는 갑자기 변한 겨울의 모습이 의아했다. 그리고 이럴 때면 자신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겨울이 누군가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어한다는 뜻이었기에.

…그게 자신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도 안다.

겨울은 그런 아이니까. 한 번 마음에 선 그은 사람 다시금 그 안쪽으로 넣어주지 않는- 바르고 명확한 여자.

그래서 기재는 늘 돌아가고 싶었다. 겨울을 처음 봤던 대학교 3학년 때로. 그 날부터 다시 우리 인연을 새로 쓰고 싶어. 그럼 너와 난 달라졌을까. 몇 년 만에 만난 동아리 선후배 사이 말고, 남자와 여자 사이. 동학년 부장님과 옆 반 동료교사 말고, 연인 사이. 전 날 술을 너무 마셨다며 연구실 소파에 벌러덩 누워있다가 손만 까딱 인사하는- 하나도 신경 안 쓰는 사이 말고 입장과 동시에 옷매무새를 신경쓰는, 불편한 사이.

그런 거 나 되고 싶은데.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방송부 면접날, 총괄 PD로 신입생들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던 자신과 그런 자신을 똘망똘망 쳐다보던 어린 여자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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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는 미처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습 PD와 총괄 PD로, 사수 부사수로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알게됐다. 이렇게 마음 편히 떠들 수 있는 이성이 몇이나 될까- 하고. 그저 편한 여동생에서, 자신도 모르던 좋아한다는 감정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왜냐고? 얼마 가지 않아 겨울이 자신을 따로 술자리에 불러냈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덜컹이는 심장을 애써 모른척하며 무심히 앞자리에 앉고 나서 알게 됐다. 겨울의 눈망울에 맺힌 자신은, 절대 이성이 될 수 없음을.


-오빠, 사실 저 솔직히 말할 거 있는데- 오빠는 만약 누가 자기 좋아한다고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직접 고백하는 사람이 좋아요, 아니면 넌지시 티내는 사람이 좋아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혹시,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던 건가. 싶어 대답했던 24살의 자신을, 기재는 아직도 후회한다. 솔직하지 못한 남자라서, 어려서, 지금 사이도 애매해질까봐, 계속 보고 싶어서 했던 말.


[어, 뭐 왜. 누가 나 좋대? 글쎄, 난 아무래도 상관 없는데. 일단 누가 나 좋다고 하면 그 사람한테 마음이 갈 것 같긴 해. 왜? 너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네가- 겨울아. 네가 날 좋다고 해준다면- 이 자리에서 어떤 티를 내준다면- 나 너에게 좀 더 다가가도 될까. 하는 진실한 마음을 뱉지 못한 그 순간, 자신이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지고 말았다.

[다행이다. 누구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건 아니구나? 혹시 먼저 좋아해야지 연애하는 타입도 아니네. 오빠, 사실 오빠 좋아한다는 여자애가 있는데 저보고 도와달래요. 제가 누군지 말은 안 할테니- 앞으로 누군가 다가오면 좀 잘해 봐요. 내가 오빠랑 친하게 지내니까 걔가 질투가 났나봐. 근데 난 오빠도 제 친구도 너무 소중하거든요? 그래서 둘 사이에 나 안 끼고 싶어요. 대신 내가 좋아하는 사람 있는지랑 먼저 고백하는 여자애 어떤지는 알아온다고 했거든요. 다행이야! 휴, 나 미션 성공인 거예요 이정도면!]



힘이 풀렸다.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앞에서 티내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이 술자리마저 잃게 되니까. 알고보니 겨울과 가장 친하게 지내던 방송부 후배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이를 겨울에게 견제 반 고민상담 반으로 이야기 한 것. 그리고 겨울은, 자신과 여자애 모두를 지키는 선택을 했다. … 그리고 다시는 그 선이 깨지지 않았다. 기재는 얼마 후 맞딱드린 의외의 고백을 정중히 거절했고, 겨울이 애써 선택한 사이를 지켜주기로 했다.


그래서 시작했다. 짝사랑.
말도 안 되는.
눈 앞에 있으면서, 이대로 너와 친하게 지내는 시간이 많다면 나는 괜찮다하고 자기 위로를 하면서.


이 년 뒤, 임용고시를 보고 군대에 입대한 기재가 서서히 겨울을 잊고 다른 연애를 두어 번 하기도 했다. 그러다 헤어지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제대하고 몇 년 후 우연히 근무하던 학교에서 신입교사로 겨울을 마주했을 때, 기재의 마음이 다시금 덜컹이기 시작했다. 이루어지지 않은 풋사랑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이길래 이렇게 다시금 다가온 걸까. 이번에는 빙빙 시간만 돌리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 그랬는데 또 기회만 보다, 좋은 오빠가 곁에서 될 것만 같다. 불안하다.


네가 누구를 마음에 품었든, 나 이제는 널 더이상 우정으로 두지 않을래. 난 그런 적 없거든. 네가 그은 선, 이제 내가 지워보려고 해. 어딘가로 날아가기 전에.

그러니 겨울아, 알려줘.
넌 지금 누구 때문에 바뀐거니?
누가 네 마음 안에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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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일주일째 학교에서 패션쇼를 열고 있을 무렵, 더 이상 안 되겠다 다짐한 기재가 겨울의 교실 문을 두드린다. 드르륵 무심히 열린 문을 보고 겨울이 무슨 일이냐 묻는다.


[임겨울, 이번 주말에 뭐 해.]


-으에, 에? 나? 왜요. 뭐 일 시키게? 아 싫어. 나 바빠요. 하나도 안 한가해. 지인짜 바빠요 부장님! 엄청 약속 많아. 그러니까 생활인권 보고서 나한테 쓰라고…


[아니 그거 말고. 그런 거 말고.]


괜히 문을 한 번 쓰다듬는다. 의아한 겨울의 손이 키보드에서 떼어지고, 눈짓으로 말해 보라는 신호를 보낸다. 저 무심하고 평안한 눈- 이제 내가 바꿀게. 기재는 드디어 용기를 낸다.


[밥 먹자. 가고 싶은 카페도, 같이 가.]


-엥, 주말에? 주중 말고? 나랑? 아 왜애. 나 말고 여자랑 놀아야지. 그래야 결혼해 오빠. 나랑 만나면 알맹이가 없잖아! 아휴.


와하하 웃으며 농담조로 말을 건네는 겨울이 밉다.


[그래서. 그래서 주말에 보자는 거잖아. 너랑. 너를.]


-으어, 아, 아…?

어색하게 웃어넘기려는 겨울에게 다시 한 번 쐐기를 박는다. 이제 너 흔들려라, 나한테. 불편해지자, 우리.


[나 너 옛날부터 좋아했어. 이거 데이트 신청이야. 나랑 데이트하자, 겨울아. 이번 주 토요일, 너 오랜만에 약속 없다고 좋아한 거 다 안다. 점심에 만나자. 합정역에서 기다릴게.]


다시금 닫히는 문. 그리고 이게 무슨 세상인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 온 몸으로 주변 남자들이 모두 경계 신호를 보낸다.

겨울은 그만, 고장나고 말았다. 계획서고 뭐고, 나 큰일이다.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이젠 기재 오빠까지.

이번 겨울에 마가 낀 게 분명해.

겨울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 인생에 뭘 잘못한 걸까? 그래서 로맨스를 가장한 고통을 저 하늘에서 주는 건 아닐까?



의미 없는 넋두리가 텅 빈 교실을 한 바퀴 돌았다.

나 이번 주 토요일에, 두 사람 다 만나게 생겼다. 중복 약속인가-

겨울은 다시금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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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진 출처: 나인우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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