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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Aug 09. 2024

독서도 '장비 빨'

어떤 장비를 활용하세요?


내가 가장 반기는 선물은 도서 쿠폰이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 내가 ‘읽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아주는 다정한 친구들이 보내준다. ‘산책 가방’을 받은 적도 있다. 손잡이가 달린 천으로 된 북 커버다. 손상되기 쉬운 종이책을 보호해 주고 어떤 책을 보는지 표지를 가려주는(도대체 무슨 책을 읽길래!) 북 커버는 언제나 책을 들고 다니는 독서가들에게 무엇보다 유용한 도구다. 손잡이가 달려있어 이동할 때도 편하다.      


예전에는 ‘장비 빨’이라는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물욕의 합리화’라고 판단했다. 등산을 시작하면 등산복부터 지르고, 필라테스를 시작하면 레깅스부터 알아보고, 테니스를 시작한다면서 테니스 스커트를 고르고 있는 이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쇼핑하고 싶어서 운동을 시작하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실제로 그렇게 장비에 진심이었던 사람들이 운동을 얼마 못하고 그만두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나’ 싶었다.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그런데 막상 겪어보니 ‘장비 빨’을 마냥 무시할 일은 아니었다. 2019년부터 지금까지 내가 필사를 꾸준히 하는 데 만년필과 질 좋은 노트라는 장비가 든든히 받쳐주고 있었다. 좋을 글을 곱씹어 읽고 수집하는 필사 행위 자체도 좋지만, 손을 움직여 쓰는 물리적인 행위가 주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문장을 끼적일 때면 단단한 과일을 예리한 과도로 깎는 것처럼, 펜촉으로 종이를 깎는 소리가 났다. 종이에 글씨를 새겨 넣는 조각가가 된 기분이다.     


매일 필사하면서 나는 ‘독서 장비’를 하나둘 늘려갔다. 책을 펼쳐서 베껴 쓸 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도록 집게형 문진으로 고정한다. 다이소에서 장만한 날짜 스탬프를 필사 글귀 마지막에 찍어서 기록을 남긴다. 내가 아는 부지런한 독서가는 새 책을 사면 둘러있는 띠지를 버리지 않고 반으로 접은 후 코팅해 책갈피로 쓴다고 했다. 버리기 아깝고, 끼워두자니 불편한 띠지를 이보다 더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까. 이 또한 독서의 재미 요소가 아닌가.      


‘벽돌책’이라 불리는 두께감 있는 책을, 단편소설 읽을 때처럼 소파에 누워 읽을 때면 금방 손목이 뻐근했다. 책상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읽자니 뒷목이 뻐근했다. 손을 뗄 때마다 자꾸만 앞으로 넘어가는 페이지 때문에 읽고 있던 부분이 어디인지 다시 찾아야 하는 일도 반복됐다. 그런 소소한 피로감이 은근한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어야겠다’라고 단념하게 했다.     


독서대라는 물건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도서실에 틀어박혀 공부하던 수험생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목 건강을 생각해 속는 셈 치고 ‘독서대’를 장만했는데 그동안 느꼈던 모든 불편이 사라졌다. 각도 조절이 되니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고 피로감이 덜하니 독서 시간이 늘었다. 자동차 와이퍼처럼 생긴 책장잡이가 책 양쪽 페이지를 든든하게 잡아주니 양손이 자유로워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기도 편하다. 요즘은 필기하기 쉽게 2단 독서대도 나와 있던데 탐이 난다. 서평 쓸 때 유용하지 싶다.

     

눈이 피곤하다면 ‘큰 글자 도서’도 장비로 고려해 볼 만하다. 글자가 작으면 아무래도 읽어나가기가 힘드니까. 내용을 이해하는 데 써야 할 집중력이 글자를 해독하는 일에 소모되는 것이다. 큰 글자 도서는 시력이 좋지 않은 분들을 위해 글자 크기를 130%로 확대해서 만든 책이다. 이전에는 큰 글자 도서가 나와는 관계없는 물건이라 여겼다. 도서관에서 얼핏 지나가면서 봤을 따름이었다.      


나의 책 《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의 큰 글자 도서가 출간된 후 생각이 바뀌었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샘플 책을 받고 우선 그 압도적인 크기에 놀랐다. 책의 표지며 목차, 본문까지 꼴은 원래 책과 똑같은데 마치 뻥튀기 기계 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커졌다. 펼쳐보고는 더 놀랐는데, 말 그대로 글자 크기가 커서 눈이 시원했다. 이런 책이라면 내용이 어려운 책도 좀 더 쉽게 읽힐 것 같다. 같은 책이지만 전혀 다른 독서 체험이었다.


부모님께 큰 글자 책을 선물로 드렸다. 책을 일곱 권이나 냈지만, 아빠는 딸이 낸 책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원래 독서에 취미가 없으셨고, 뇌졸중을 앓으신 후 활자를 조금만 읽어도 눈이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엄마 말에 따르면, 그런 아빠가 요즘 큰 글자로 나온 유일한 내 책을 읽고 계신단다.      


초보 독서가일수록 책을 읽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줄여 독서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맞다. 초보니까 장비를 활용해야 한다. 초보 독서가는 장비 탓을 하는 대신 ‘장비 빨’이라도 세워 책에 재미를 붙이자. 장비를 장만하느라 투자한 비용보다 독서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이 훨씬 많다.



*좋은 독서 아이템 아시는 분은 추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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